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작가-1분에14타)입니다.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자명(子明), 호는 오리(梧里). 대흥(大興) 출신 박율(朴繘)은 아버지 박이건(朴以健)과 어머니 여계선(呂繼先)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고 성리학에 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다소 엉뚱한 면모가 있었다.
그의 엉뚱함은 언문으로 쓰인 낙서 때문에 시작되었다.
개 똥 아
똥 누 니
아 니 오
저잣거리에서 아이들이 장난으로 써 놓은 낙서를 접한 박율은 세로로 읽어도 말이 되고 가로로 읽어도 말이 되는 문장에 흥미를 느꼈다. 남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을 낙서 때문에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율은 글공부를 하다가도 세로와 가로로 말이 되는 문장을 찾기 시작했고, 급기야 앞으로 읽어도 말이 되고 뒤로 읽어도 말이 되는 양방향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찾으면서 '대칭'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집착은 그를 더욱 강박적으로 만들어 가로, 세로, 대각선, 양방향 모두 대칭이 되는 문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첫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던 박율은 뼈대도 보통 뼈대가 아닌 용가리 통뼈 양반 집안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문과 시험이 아닌 수학과 계산을 맡은 산원(算員)이 되고 싶어 하급 기술관 시험을 치려고 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이루어진 잡과에 몰래 응시하려다가 부친과 동문수학을 했던 참시관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을 맞았다. 치도곤을 맞았다고 해서 진짜로 곤장을 맞은 건 아니고 양 싸대기를 왕복으로 후려 맞아 쌍코피가 났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박율은 재응시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박율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과거 시험의 책문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댓구와 대칭이 이루어진 시어로 표현하시오>
언뜻 쉬운 문제 같아 보이지만 성리학 공부에만 매달린 유생들에게는 손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제시문이었다. 정철의 속미인곡이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했다는 식의 해석에만 매달려 공부하던 일반적인 유생들과 달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쓴 정철이 글에서 엿보이는 진심과 내용으로 미루어 동성애자가 분명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쳐서 훈장 선생님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날리도록 두들겨 맞았던 박율에게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손쉬운 문제였다.
대칭이라면 자신 있었던 박율은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후 양손을 탁탁 털어 대며 제일 먼저 답안지를 내고 과거 시험장을 나설 수 있었다.
음주와 가무를 즐기며 창민요(唱民謠)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박율은 "산천초목 속잎이 난듸 구경가기 얼화 반갑도다."라는 첫 구절에 영감을 받아 대칭 형태의 한시로 표현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에 식은 죽을 후식으로 들이키는 것보다 쉬웠다.
과거 시험 책문에 대한 박율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山川草木(산천초목)
川山木草(천산목초)
日月明星(일월명성)
月日星明(월일성명)
雨雲風雷(우운풍뇌)
雲雨雷風(운우뇌풍)
자연에 대한 도입부 벌스(Verse)로 몸을 푼 후 본격적인 칠언절구로 작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山峰高揚於碧空(산봉고양어벽공)
碧空於高揚山峰(벽공어고양산봉)
花開香氣滿四方(화개향기만사방)
四方滿香氣花開(사방만향기화개)
浪濤撫慰大海心(낭도무위대해심)
大海心撫慰浪濤(대해심무위낭도)
自然之美充滿胸(자연지미충만흉)
胸充滿之美自然(흉충만지미자연)
푸른 하늘에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고,
높은 산봉우리 너머로 하늘은 파랗다.
꽃이 피고 그 향기가 사방에 가득하니
향기로운 꽃이 곳곳에 피어나는구나!
파도가 바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바다의 마음이 파도를 진정시키네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슴을 가득 채우니,
아름다움으로 벅찬 가슴이 자연스럽다.
답변이 너무 쉬워 보여서이었을까? 아니면 문장이 너무 가벼워 보여서이었을까 박율은 아쉽게도 장원급제를 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과거에 급제해 자신의 고향 은산(현재의 부여) 현감이 될 수 있었다.
박율은 관직에 오른 후부터는 엄한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칭에 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계속되는 대칭에 대한 그의 집착은 행과 열, 그리고 대각선의 합이 모두 같은 정사각형 배열이 이루어지는 마방진에 관한 탐구로 이어졌고 결국 그의 명석한 두뇌는 다음과 같은 3x3 마방진의 한 예를 만들 수 있었다.
2 9 4
7 5 3
6 1 8
상하좌우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숫자의 합이 15가 되는 마방진을 발견(또는 발명)한 박율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 쾌감은 글공부와 문장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이자 전율이었다.
이러한 박율의 수에 관한 연구는 '운’과 '숫자’의 이론에 기반하여 우주와 인간의 운명을 연구하는 분야인 주역 철학과 명리학 공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주역에서 인간과 자연의 존재 양상과 변화 체계를 상징하는 64개의 괘를 연구하던 박율은 각 괘가 0과 1로만 이루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0과 1의 숫자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떨릴 정도로 감격스러움을 느꼈다.
모든 것의 시작이며 중심인 하늘(天)을 뜻하는 건괘(乾卦)는 숫자 1로, 땅(地)을 뜻하는 곤괘(坤卦)는 숫자 0으로 바꾸어 최소 단위로 이루어진 이상적(離散的)인 수치로 세상을 풀이할 수 있다는 박율의 생각은 숫자 자체가 여러 가지 괘를 이루어 ‘스스로’ 세상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급진적 발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박율은 행정 업무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찰방(察訪, 종6품)에게 현의 관할을 맡겨두고 본격적으로 '수'에 대한 서책을 찾으러 다니면서 연구에 매진하였다.
세월이 흘러 종4품에 해당하는 군수가 된 박율이 다스리던 고장은 그해 여름 커다란 홍수 때문에 마을의 다리가 모두 부서지고 가축들이 죽어 나갔다. 농작물이 모조리 고갈되고 교량과 교각을 새로 수리해야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박율은 측량하는 방법을 다룬 서책 구고(句股)를 사들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박율은 직삼각형을 일컫는 구고(句股)의 직각변 구(句)와 사선의 긴 변 고(股)의 넓이를 측량하는 계산 방법을 보자마자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길이의 제곱에 합이 빗변의 길이 제곱과 같다는 세 평방의 정리(피타고라스 정리 Pythagorean theorem, Pythagoras' theorem)를 자연스럽게 깨우친다.
섬광처럼 자신의 뇌리를 스치는 영감으로 새로운 측량 방법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 박율은 신속하게 홍수 피해 복구 문제를 해결한 능력을 인정받아 종2품의 장량으로까지 진급하게 된다.
직사각형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한 박율은 원주율까지 스스로 깨우친 후 입천원일(立天元一)에서 비롯된 천원술(天元術)의 방정식 계산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천지가 형성되기 이전 혼돈 상태에 만물의 근원을 뜻하는 원(元)에 해당하는 미지수라는 개념을 적용해서 주어진 조건을 만족하는 방정식을 구할 수 있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찾아낸 박율은 지금까지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책으로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책의 이름은 산학본원(算學本原)이다.
산학본원(算學本原)을 완성해 나갈 즈음 박율은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서책을 접하게 된다.
주역의 괘에 나타난 형상과 변화를 응용해 수리(數理)에 대해 이해하려는 상수학적(象數學的) 인식을 바탕으로 수리 철학을 저술한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서책을 발견한 박율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구수략(九數略) 안에는 역경(易經)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로, 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합이 같은 특징을 가진 완벽한 방진(方陣)이 만들어져 있었고, 이러한 숫자들의 계산법을 연구하는 산학(算學)이 자연 만물의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저자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서책엔 서로 직교인 9×9 방진 쌍 및 (서로 직교가 아닌) 두 개의 10×10 방진이 수록된 서책에는 두 10×10 방진을 각각 백자자수음양착종도(白子子數陰陽錯綜圖)·백자모수음양착종도(白子母數陰陽錯綜圖)라고 명명하였으며, 9×9 직교 방진을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세계적인 수학자인 오일러의 발견보다 60년 이상 앞선 것임.)
박율은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만든 마방진(魔方陣)과 지수귀문도(地數龜文圖)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닭살이 돋고 감동의 물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도가 되어 덮치는 듯한 엄청난 압도감에 사로잡혀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박율은 외롭지 않았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그라면 0과 1로만 세상 이치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양의 숫자가 조합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박율 자신의 발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숫자와 산학(算學)만으로도 세상 이치를 밝힐 수 있는 심오한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박율의 아들뻘 되는 나이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은 자신이 만나기엔 워낙에 고귀한 신분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정승을 지낸 소론의 영수가 아닌가. 노론파에 속하는 자신과 대립하는 파벌의 최고 관리를 만난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던 박율은 문득 140여 년 전 25살 이상 차이가 나는 나이에 리(理)와 기(氣)의 관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을 떠올렸다.
박율은 내키지 않았지만, 본진 한가운데 적장을 상대하러 가는 장수의 심정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0과 1의 괘로만 풀이한 서신을 작성하여 최석정에게 보냈다.
곧바로 도착한 회신에는 '만나서 바둑이나 한판 두자.'는 간단한 내용뿐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한강을 건너서 뗏목을 타고 가다 뒤집혀서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나룻배가 뒤집혀서 그냥 막 헤엄치면서 서서서~~~ 천신만고 갖은 개고생 끝에 정승 집에 도착한 박율은 물에 빠진 생쥐 꼴에 초라한 행색으로 정승 집 경호 무사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해 가며 사지가 들려서 나가는 수모 끝에 간신히 최석정을 만날 수 있었다.
최석정을 처음 마주한 박율은 매우 놀랐다. 어린 시절 보약을 잘못 먹었는지 자기보다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양반이 겉늙어 보이는 엄청난 노안(老顔)에다가 백발이 성성한 촌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눈빛만큼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고 영롱했다. 더 충격적인 건 늙은 외모와 달리 최석정의 목소리는 청나라 수입산 신상 옥쟁반 위에 굴러가는 엽전처럼 맑고 산뜻했다.
박율에게 갈아입을 비단옷을 내어 주고 극진하게 음식까지 대접한 최석정은 "삼라만상을 산학(算學)과 0과 1의 괘로 터득한 선생 같은 분이라면. 가로세로 19줄씩, 361개 교차점에 펼쳐지는 바둑의 오묘함도 잘 아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수담(手談 손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뜻으로 바둑의 별칭)'을 권한다.
예사롭지 않은 풍모답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바둑으로 대화를 시작하자는 최석정의 제안에 박율은 과연 뭐가 달라도 다른 경지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상수를 양보하여 박율에게 백돌을 두게 한 최석정의 행마는 인간의 그것이 아닌 듯 은일하고 초탈하며 무욕의 경지였다. 채 35수밖에 안 두었는데도 삼라만상의 지극한 이치가 담긴 느낌이었다. 최석정의 바둑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인간의 경지가 아닌 행마라고 깨달은 박율은 36번째 수를 두면서 우변 실리 작전을 구사했다. 지금까지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던 최석정은 박율의 수를 내려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석정은 한참 장고 끝에 ‘어깨 짚기’ 전략의 37수로 응수했다. 박율은 그 한 수로 자신의 패배를 직감할 수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앞에서 바둑을 두는 자는 사람이 아닌 그 어떤 아득한 초월적 존재 같다고 느꼈다.
바둑 한 판으로 최석정이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느낀 박율은 바둑판을 물린 후 0과 1의 괘로만 새로운 생명과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발상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한다.
☰ (1,1,1) ☱ (1,1,0) ☲ (1,0,1) ☳ (1,0,0) ☴ (0,1,1) ☵ (0,1,0) ☶ (0,0,1) ☷ (0,0,0) 각 괘를 이용해서 주역의 체계에서도 모든 참 명제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증명 가능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 박율은 이는 곧 진리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불완전성을 정리한 것이라고 말한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때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시선과 미소로 응답하며 경청하던 최석정은 박율에게 우주의 근본 원리인 0과 1로 이루어진 '수'가 '이(理)'라고 했을 때 그 숫자들이 모이고 흩어져서 어떻게 '기(氣)'로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아느냐고 묻는다.
최석정의 질문에 박율은 솔직하게 대꾸한다. 아직 그 방법을 찾을 순 없었지만 분명 그러한 '장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답변한다.
최석정은 "숫자를 더하고 뺄 수 있는 주판이 무한하게 늘어서서 단계별로 내용을 읽고 쓸 수 있는 자동화된 기계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과 함께 최석정 자신이 보기엔 250여 년 전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던 물시계를 개량해, 더욱 정밀하게 자동화한 장영실의 발명품 자격루(自擊漏)에서 그 실마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최석정은 박율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 자격루(自擊漏)의 실체를 직접 보기는 어려울 테니 자동 시보 장치의 작동 원리가 상세하게 적혀 있는 보루각기(報漏閣記)를 참고하라며 서책을 선물로 내준다.
귀하디귀한 보루각기(報漏閣記)를 받아 든 박율은 감동의 물결이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도가 치면서 산 넘고 물 건너 한강을 건너서 뗏목을 타고 가다 뒤집혀서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나룻배가 뒤집혀서 그냥 막 헤엄치면서 서서서~ 이곳까지 고생해서 온 보람이 있다고 느낀다.
감사와 감동이 뒤범벅된 왕만두만 한 눈물을 뚝뚝 흘려 대던 박율은 자신이 집필한 산학본원(算學本原)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한 후 정승 집을 나선다.
박율이 한성을 벗어나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사당리(지금의 사당동 이수 교차로)에 있던 궐리사(闕里祠 공자의 사당) 앞을 지나칠 때였다. 나루터로 향하는 번화가에는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울릉도 호박엿 엿장수가 엿가위 장단에 맞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거다 저거다 말씀 마시고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길 잡고
인천 앞바다에 막걸리가 떴어도 사발이 없으면 못 마십니다~
산에산에산에산에 산토끼야~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 가느냐?!
아, 애들은 가~!
남쪽 지방에서 과거를 치러 오는 선비들이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절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잠시 옛 추억에 잠겼던 박율은 사당 홍살문에 합격을 기원하는 엿가락에 붙어 있던 부적을 발견하고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렴풋한 영감(靈感)에 사로잡힌다.
박율은 뭔가 계시를 받은 듯한 느낌이었으나 그 영감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알지를 못했다. 박율은 변비 난 놈 똥 누듯 한참을 끙끙대며 조금 전 떠올린 착상의 실체가 무언지 곰곰 되작되작 되짚어 보며 고향으로 향했다.
은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뿌옇게 안개가 낀 듯한 그러나 뭔가 그 안개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다니는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박율은 온수현(溫水縣: 지금의 아산시) 온천 옆 가마골(加麽谷)을 지나치던 중 덜크덩 덜크덩 찍어대는 물레방아를 구경하다가 말이 끄는 기리고차(記里鼓車)에 치일 뻔한다. 그 수레는 1리(里)를 갈 때마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북을 쳐서 거리를 알리게 만든 자동 거리 측정용 수레였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둥둥둥 북을 칠 때마다 박율의 머릿속은 뿌옇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박율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최석정에게 선물 받은 서책을 펼쳐 자격루의 설계도면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덜크덩~ 덜크덩~ 또르르 둥!둥!둥! 덜크덩~ 덜크덩~ 또르르 둥!둥!둥! 구성지고 리드미컬하게 주변의 소리가 어우러진 가락이 만들어지면서 박율은 닫혔던 구름이 걷히고 천지가 열리며 하늘의 한 줄기 빛이 넘실거리는 듯한 신비로운 환각을 체험한다.
중이 염불을 외듯 한참 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박율은 점점 공자의 사당에서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히던 어렴풋한 영감의 가닥이 잡혀 나가기 시작했다.
사당 홍살문에 붙어 있던 엿가락 부적과 자격루(自擊漏)의 정교한 도르래 장치들과 쇠구슬로 움직이던 자동 시보 목각 인형과 기리고차(記里鼓車)의 정밀하고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구동하는 북 치는 자동인형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톱니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율의 천재적인 발상을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따라잡기엔 많은 무리수가 따르나 최대한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부적(符籍)은 종이에 글씨, 그림, 기호 등을 그린 것으로 액막이나 악귀, 잡신(雜神)을 쫓거나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주술적 도구다. 부적(符籍)에 그려진 글씨, 그림, 기호 중 인간에 가깝게 구현할 부적의 문양과 명명학적 주문의 연결 고리를 찾는다면, 자격루(自擊漏)와 기리고차(記里鼓車)의 북 치는 목각 인형처럼 사람을 똑 닮은 자동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주문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러한 자동 인간의 발명이 가능하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人工智能)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부적의 기호 대신 0과 1의 괘로만 이루어진 숫자로 인공지능(人工智能)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제야 정승 최석정이 얘기했던 '그 단초를 장영실의 자격루에서 발견했다.'라는 말의 진의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던 박율은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에 몸서리치며 탁! 하고 자신의 양 무릎을 쳐 댔다.
박율은 최석정의 기묘했던 바둑 37수를 복기하듯 그다음에 이어졌던 말을 떠올렸다. "숫자를 더하고 뺄 수 있는 주판이 무한하게 늘어서서 단계별로 내용을 읽고 쓸 수 있는 자동화된 기계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모든 실마리가 풀린 듯 박율은 구름 먼지를 일으키며 한달음에 은산으로 향했다. 그는 결연한 발걸음으로 온수현의 서쪽 끝에 있는 작은 강을 건넜다. 박율이 잠시 지친 발을 쉬기 위해 맑고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여행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박율은 산의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미분의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또한 강물의 흐름을 적분하여 전체적인 이동 거리를 계산했다. 자신의 발을 차갑게 적시는 강물을 따라가면, 적분을 통해 내가 걸어온 거리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높은 산을 넘어야 했던 박율은 산의 경사를 계산하면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 올랐다. 박율은 정상에 서서, 주변의 풍경을 눈으로 그림을 그려 가며 나중에 두 번째 '산학본원'에 추가할 삽화로 삼기로 했다.
그는 평원을 가로질러 은산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고,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 그는 평원의 넓이를 계산하며, 그 결과를 두 번째 '산학본원'의 새로운 장에 추가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여정은 미적분의 원리를 사용하여 최적의 경로를 찾는 과정이었다. 박율은 이 여정을 통해 미적분이 단순한 산학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여러 측면에 적용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깨달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무렵 마주친 샘물로 목을 축이던 박율은 샘물이 샘솟듯 머릿속에서 샘솟는 발상들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적분학의 무한한 가능성과 주역의 괘가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집으로 향하는 박율의 마음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연속적이며, 그 속에서 무한히 작은 순간들이 모여 큰 흐름을 이룬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미적분학의 극한과 도함수가 주역의 괘처럼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 변화의 방향과 크기를 예측하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는 강변을 걸으며 물결의 흐름을 관찰했다. 각 물결은 주역의 괘 하나하나처럼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강의 전체 흐름을 이루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박율은 이를 보며 미적분학의 적분이 어떻게 분리된 순간들을 하나로 합쳐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지를 느꼈다.
언덕을 오르며 그는 기울기를 계산했다. 그 언덕의 경사는 음효(⚋ 0)와 양효(⚊ 1)가 교차하는 괘와 같아, 각 단계에서의 변화를 나타냈다. 박율은 언덕의 경사를 미분하여 각 지점에서의 변화율을 찾아냈다. 박율은 마침내 은산 집에 도착했을 때, 미적분학과 주역의 괘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인지를 완전히 이해했다. 완전히. 그는 이 깨달음을 기록하여, 미적분학과 주역의 괘가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며 세상을 설명하는지를 후세에 전하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도착한 박율은 여독(旅毒)이 쌓여 오랜 장거리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몸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먹을 갈아 대며 화선지에 두 번째 산학본원을 집필해 나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아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박율은 문득 요의(尿意)를 느껴 뒷간으로 향했다. 뒷간에 도착하기 직전 방광이 터질 것 같았던 박율은 메밀꽃이 하얗게 핀 벌판이 보이는 마당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갈겨 댔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별자리가 있었고, 박율은 그중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별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오줌을 싸면서 메밀 꽃밭과 밤하늘의 별들이 마치 굵은 왕소금을 뿌려 놓은 거 같다고 느낀 박율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무심코 '반짝반짝 작은 별'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휘파람 소리는 별빛에 맞춰 점점 더 명확한 가락을 이루었고, 그 순간 그에게 놀라운 발견과 깨달음이 찾아왔다. 마치 깜빡이는 별자리들이 그의 가락에 맞춰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주역의 괘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별빛들이 그의 눈앞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입가에선 자연스레 '반짝반짝 작은 별’의 가락이 흘러나왔다.
반짝반짝 작은 별 (동쪽 하늘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반짝반짝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 작은 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비치네)
반짝반짝 작은 별 (모두 모여 정답게)
아름답게 비치네 (반짝반짝 비치네)
그 순간, 마치 우주가 그에게 속삭이는 듯, 별자리가 주역의 괘와 연결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품고, 기다란 오줌 줄기를 지그재그로 갈겨 대며 별빛이 가득한 별자리의 연결 고리를 하나하나 이어 나갔다. 주변은 고요했고, 오직 별빛과 함께 그의 작은 휘파람 소리만이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박율의 머릿속에선 이미 별자리와 음악, 그리고 주역의 괘가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천문(天文)의 위치와 아악(雅樂)의 가락을 주역의 괘를 이용한 0과 1로만 이루어진 산학(算學)으로 연결되면서 자동으로 연산되는 주판들과 이것들이 모두 모여 하나로 연결된 음과 양의 0과(⚋)과 1(⚊)이 어우러져 숫자 ‘스스로’가 진화를 거듭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人工智能)의 탄생이 가능하리라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아침이 밝아 오기 무섭게 하인들을 시켜 은산에 있는 모든 주판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 박율이 서둘러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장터에 있는 떡방앗간 집이었다. 은산에서 유명한 떡방앗간 '모락모락'을 운영하는 여주인이자 육 남매를 기르는 억척 어멈이 그날도 장터에서 떡을 팔고 있었다.
똑 사세요! 똑이에요!
그녀에게 떡 대신 절편의 표면에 문양을 찍는 떡살을 종류별로 구입한 박율은 구절판에 사용되는 팔각형의 찬합도 더불어 샀다.
박율은 대장간을 들러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에게 선물 받은 보루각기(報漏閣記)의 설계도면을 흔들어 대며 각종 부품 제작을 의뢰했다. 대장장이는 처음 보는 복잡한 도면에 눈을 크게 떴지만, 박율의 열정에 감동하여 도와주기로 했다. 대장장이들은 철을 녹여 톱니바퀴와 꽈배기처럼 꼬아서 만든 장치(스프링), 최근 청나라에서 수입되어 한양의 양반 자제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막대사탕 탕후루 모양의 부품(레버)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이어서 박율은 은산의 베틀 할매를 찾아갔다.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초가집에서 할매는 베틀 앞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며, 할매의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빛나는 씨줄과 날줄이 엮이고 있었다.
짤깍짤깍 베 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꼬노라.
할매는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며, 베틀의 발판을 부드럽게 밟았다. 촘촘히 엮인 천 위로 할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베틀의 덜그럭거림을 구경하던 박율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할매에게 다가가 쌀 열 석에 해당하는 엽전 50냥을 건네주면서 베틀을 구매했다.
마지막으로 박율이 들른 곳은 제지 공장이었다. 젊은 시절 세검정 근처 조지서(造紙署)에서 지장(紙匠)으로 이름을 날렸던 조지기(曺紙技)라는 장인에게 두껍고 질기지만 구멍이 잘 뚫리는 성질이 있는 한지(韓紙)를 주문했다. 두껍고 질긴데 구멍이 잘 뚫린다? 닥종이의 달인으로 살아온 지 어언 40년 조지기(曺紙技)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해괴한 주문에 닥종이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발휘되어 닥나무 껍질을 연속으로 벗겨 낸 흑피와 피닥을 찬물에 담가 불리기를 여러 번, 닥칼을 이용해 겉껍질을 벗겨 만든 백피를 햇볕에 널어 말리고 잿물에 삶기를 수십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양옆으로 잡아당겨도 잘 찢어지지 않지만 송곳이나 뾰족한 거로 찌르면 송송 구멍이 잘 뚫리는 특이한 한지를 제작해 내기에 이른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모든 부품이 준비되었다. 박율은 자신의 집으로 부품들을 모두 가져와 조립하기 시작했다. 떡살에 새겨진 문양을 이용해 차분기관(差分機關)의 판독 부분을 만들고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레버가 움직이며, 스프링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밤새도록 마을을 울렸다.
박율은 조심스럽게 기계의 마지막 부품을 조립했다. 그리고 큰 숨을 들이쉬고 핸들을 천천히 돌렸다. 기계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조용한 소리를 냈다. 기계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움직이면서 숫자를 계산하고 차례대로 정렬되어 계산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율의 눈가에는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바라보며,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 상상했다. 차분기관은 박율의 2차 방정식의 계산을 위해 필요한 값들을 저장하고, 이 값들의 차분을 이용해 새로운 값들을 계산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곱셈이나 나눗셈 없이도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설계한 차분기관이 7차 다항식까지 계산할 수 있고, 소수점 31자리까지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박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율의 아들 박두세(朴斗世)가 울릉도 호박엿을 씹어 먹으며 집으로 들어왔을 때 대청마루에 누워 있던 박율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박율의 손에는 차분기관의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다. 박율의 아들 박두세(朴斗世)도 영특한 사람이었지만 그 설계도면과 눈앞에 놓여 있는 해괴망측한 차분기관을 이해할 만한 수준의 머리는 아니었다.
박율이 사망한 후, 최석정(崔錫鼎)의 서문을 붙여 박두세가 책을 출판했는데, 원본에 오류가 많고 빠진 부분도 있어서 보완이 필요했다고 판단한 아들은 아버지의 산학본원을 고쳐서 냈다.
얼마 후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마저 사망하고, 컴퓨터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계산 기계의 발상과 발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