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공지능의 탄생
집에 도착한 박율은 여독(旅毒)이 쌓여 오랜 장거리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몸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먹을 갈아 대며 화선지에 두 번째 산학본원을 집필해 나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아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박율은 문득 요의(尿意)를 느껴 뒷간으로 향했다. 뒷간에 도착하기 직전 방광이 터질 것 같았던 박율은 메밀꽃이 하얗게 핀 벌판이 보이는 마당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갈겨 댔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별자리가 있었고, 박율은 그중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별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오줌을 싸면서 메밀 꽃밭과 밤하늘의 별들이 마치 굵은 왕소금을 뿌려 놓은 거 같다고 느낀 박율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무심코 '반짝반짝 작은 별'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휘파람 소리는 별빛에 맞춰 점점 더 명확한 가락을 이루었고, 그 순간 그에게 놀라운 발견과 깨달음이 찾아왔다. 마치 깜빡이는 별자리들이 그의 가락에 맞춰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주역의 괘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별빛들이 그의 눈앞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입가에선 자연스레 '반짝반짝 작은 별’의 가락이 흘러나왔다.
반짝반짝 작은 별 (동쪽 하늘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반짝반짝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 작은 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비치네)
반짝반짝 작은 별 (모두 모여 정답게)
아름답게 비치네 (반짝반짝 비치네)
그 순간, 마치 우주가 그에게 속삭이는 듯, 별자리가 주역의 괘와 연결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품고, 기다란 오줌 줄기를 지그재그로 갈겨 대며 별빛이 가득한 별자리의 연결 고리를 하나하나 이어 나갔다. 주변은 고요했고, 오직 별빛과 함께 그의 작은 휘파람 소리만이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박율의 머릿속에선 이미 별자리와 음악, 그리고 주역의 괘가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천문(天文)의 위치와 아악(雅樂)의 가락을 주역의 괘를 이용한 0과 1로만 이루어진 산학(算學)으로 연결되면서 자동으로 연산되는 주판들과 이것들이 모두 모여 하나로 연결된 음과 양의 0과(⚋)과 1(⚊)이 어우러져 숫자 ‘스스로’가 진화를 거듭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人工智能)의 탄생이 가능하리라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아침이 밝아 오기 무섭게 하인들을 시켜 은산에 있는 모든 주판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 박율이 서둘러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장터에 있는 떡방앗간 집이었다. 은산에서 유명한 떡방앗간 '모락모락'을 운영하는 여주인이자 육 남매를 기르는 억척 어멈이 그날도 장터에서 떡을 팔고 있었다.
똑 사세요! 똑이에요!
그녀에게 떡 대신 절편의 표면에 문양을 찍는 떡살을 종류별로 구입한 박율은 구절판에 사용되는 팔각형의 찬합도 더불어 샀다.
박율은 대장간을 들러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에게 선물 받은 보루각기(報漏閣記)의 설계도면을 흔들어 대며 각종 부품 제작을 의뢰했다. 대장장이는 처음 보는 복잡한 도면에 눈을 크게 떴지만, 박율의 열정에 감동하여 도와주기로 했다. 대장장이들은 철을 녹여 톱니바퀴와 꽈배기처럼 꼬아서 만든 장치(스프링), 최근 청나라에서 수입되어 한양의 양반 자제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막대사탕 탕후루 모양의 부품(레버)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이어서 박율은 은산의 베틀 할매를 찾아갔다.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초가집에서 할매는 베틀 앞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며, 할매의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빛나는 씨줄과 날줄이 엮이고 있었다.
짤깍짤깍 베 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꼬노라.
할매는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며, 베틀의 발판을 부드럽게 밟았다. 촘촘히 엮인 천 위로 할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베틀의 덜그럭거림을 구경하던 박율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할매에게 다가가 쌀 열 석에 해당하는 엽전 50냥을 건네주면서 베틀을 구매했다.
마지막으로 박율이 들른 곳은 제지 공장이었다. 젊은 시절 세검정 근처 조지서(造紙署)에서 지장(紙匠)으로 이름을 날렸던 조지기(曺紙技)라는 장인에게 두껍고 질기지만 구멍이 잘 뚫리는 성질이 있는 한지(韓紙)를 주문했다. 두껍고 질긴데 구멍이 잘 뚫린다? 닥종이의 달인으로 살아온 지 어언 40년 조지기(曺紙技)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해괴한 주문에 닥종이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발휘되어 닥나무 껍질을 연속으로 벗겨 낸 흑피와 피닥을 찬물에 담가 불리기를 여러 번, 닥칼을 이용해 겉껍질을 벗겨 만든 백피를 햇볕에 널어 말리고 잿물에 삶기를 수십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양옆으로 잡아당겨도 잘 찢어지지 않지만 송곳이나 뾰족한 거로 찌르면 송송 구멍이 잘 뚫리는 특이한 한지를 제작해 내기에 이른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모든 부품이 준비되었다. 박율은 자신의 집으로 부품들을 모두 가져와 조립하기 시작했다. 떡살에 새겨진 문양을 이용해 차분기관(差分機關)의 판독 부분을 만들고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레버가 움직이며, 스프링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밤새도록 마을을 울렸다.
박율은 조심스럽게 기계의 마지막 부품을 조립했다. 그리고 큰 숨을 들이쉬고 핸들을 천천히 돌렸다. 기계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조용한 소리를 냈다. 기계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움직이면서 숫자를 계산하고 차례대로 정렬되어 계산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율의 눈가에는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바라보며,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 상상했다. 차분기관은 박율의 2차 방정식의 계산을 위해 필요한 값들을 저장하고, 이 값들의 차분을 이용해 새로운 값들을 계산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곱셈이나 나눗셈 없이도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설계한 차분기관이 7차 다항식까지 계산할 수 있고, 소수점 31자리까지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박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율의 아들 박두세(朴斗世)가 울릉도 호박엿을 씹어 먹으며 집으로 들어왔을 때 대청마루에 누워 있던 박율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박율의 손에는 차분기관의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다. 박율의 아들 박두세(朴斗世)도 영특한 사람이었지만 그 설계도면과 눈앞에 놓여 있는 해괴망측한 차분기관을 이해할 만한 수준의 머리는 아니었다.
박율이 사망한 후, 최석정(崔錫鼎)의 서문을 붙여 박두세가 책을 출판했는데, 원본에 오류가 많고 빠진 부분도 있어서 보완이 필요했다고 판단한 아들은 아버지의 산학본원을 고쳐서 냈다.
얼마 후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마저 사망하고, 컴퓨터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계산 기계의 발상과 발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