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직장생활 분투기
김인주
나는 머리가 비상하지도 않고, 일류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박사학위를 했지만 뛰어난 연구실적을 낸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임원이 되었던 것도 아니고, 일류대학 교수처럼 남이 부러워하는 교수직도 아니었다.
역으로 얘기하면, 일류대학을 못나와도, 한 직장을 중도에 그만두더라도, 자기 분야에서 높은 실적을 못냈다고 부끄러워 하거나 못 살았다고 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저 끈질기게 즐거운 노력을 했고, 배우는 재미를 습관화하였고, 작은 성취와 도전을 즐겼고, 남에게 이익은 못되더라도 피해는 주지 말자라고 생각했을 뿐이고, 나의 한계를 인정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등교사 발령을 포기하고 민간기업 대한항공에 지원해 합격했다. 형제들은 중등학교 교사였는데 나는 다른 분야에서 도전을 하고 싶었다. MBC 방송국 PD시험에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나서다. 그러나 그 길이 아니고 이 길인가 봐 하고 금세 새 인연을 받아들였다. 이후 평생 첫 직장으로 대한항공이었다는 사실에 많이 감사하고 많은 공부가 된 것에도 자부심을 가졌다. 나를 많이 성장시켜 주었다. 우수한 동료 선후배들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배웠다.
1983년 입사 동기들은 한국외대 연대 고대 서울대 그리고 지방 국립대 몇 명 있는 정도였다. 학벌에서 밀렸다. 지방 국립대 출신으로 어떻게 경쟁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실력과 공부와 성실을 믿었다. 학벌보다 개인의 경쟁력을 믿었다. 자신감을 다졌다. 정중동 외유내강이었다.
대기업의 교육은 달랐다. 모든 일이 시스템이었다. 체계화되었다. 기존의 강의식 교육방식이 아니었다. 흥미로왔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세련되고 능력까지 있었다. 입사교육이 끝난 후 현장 중의 현장인 김포국제여객운송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인사를 잘했다. 직원들에게 고객들에게도 늘 말로 하는 인사를 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하루에 여러 번 만나도 말인사를 건넸다.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도 인사했다. 심지어 공항 청소 아줌마 구두 닦는 아저씨들과도 친하고 인사했다.
상당히 세분화 체계화되어 있는 각종 사내 자격증을 하나둘씩 취득해 나갔다. 그중 영어 정 1급 자격증은 전 직원 1만 3천여 명 중 20여 명 만 있는 귀한 자격증인데 입사 2년 만에 취득했다. 직원들이 놀랐다. 본사에서 사내 영어 강사양성 과정을 이수하고 직원 영어 강의를 업무 외 시간에 시작했다.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사원인데도 프레스티지나 일등석 카운터에 배정받아 일하기도 했다.
모든 직종에서 가장 유능한 직원이 간다는 부서이자 소위 출세가 보장된다는 본사 중앙교육원에 발령받았다. 입사 후 4년 만이다. 정말 직원들은 영어 일어 스피치 외에 업무지식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옷 입는 거부터 노는 것도 멋졌다. 각 직종별로 최고 능력자들의 집합이었다. 나도 어울리며 성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교육기획 관리 운영 영업운송 등 사무 관리업무와 직원 및 신입사원 직무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나의 사수였던 백남규선배는 평생 나의 사수로서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특히 해외 현지채용 외국인직원의 본사 소집 교육에서 담임 및 영어강의는 큰 도전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신입사원 입사 영어면접 평가위원으로서 역할도 많았다. 사내에 좋은 대학 나온 영어영문과 출신이 많은데, 회사는 나를 믿었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에 허락받고 꾸역꾸역 다녔는데, 도저히 일이 많고 눈치가 보여 근무시간에 나갈 수가 없었다. 공부 내용도 어려웠다. 나중에 중도포기를 후회했다. 상사로부터는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부하직원들로부터는 합리적이다라는 말을 들은 시기였다.
제때 과장 팀장이 되었다. 대학 때 심취한 언어에 대한 관심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스스로 좋아서 찾아서 공부했다.
다른 해외 일류기업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니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많이 이용됐다. 나는 전문가를 찾아 강의를 개설했고 기업의 교육과정에 접목시켰다. 팀장으로서 서점에 가서 좋은 책을 발견하고 저자 초빙을 하고 강의를 듣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외부 교육 기관 단체에서 대한항공의 인사 교육 연계사례를 발표해 달라고 의뢰가 와서 기업 인사교육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플라자호텔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후 기업 담당자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초빙 의뢰가 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MBA과정에 선발되었다. 야간에 받는 수업이었는데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공부하는 자체는 재미있었다. 해외 교육출장 일반출장을 다닌 것도 보석 같은 경험이었다. 항공사에 다닌다는 것은 외국여행의 기회가 늘 주어지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한국항공대 항공경영학 박사 과정에 1996년 입학했다. 무모한 일이었지만 전환이 필요했고 대학에서의 교육을 꿈꿨다. 교육 컨설팅 기업에서의 고무적인 지원 계획도 있었다. 나는 수원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교수인 친구가 석사만 있어도 대학강의는 가능하지만 먼 장래를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하다고 귄했다. 주저 없이 받아들였고 4년 만에 40세에 취득한 박사학위는 후에 많은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CS 고객만족경영 HRD 인적자원개발 등을 주제로 강의 및 컨설팅 평가심의를 위해 전국을 다녔다. 공무원 공기업 민간기업 심지어 대학에서도 진로지도 특강을 하였다. KBS MBC 아나운서 삼성 현대 직원과 탈북자 강원도 진로지도교사 강원도 교장교감 선생님 대상 강의는 기억에 남는다. 춘천여고 춘천고 학생들 강의도 하였다. 강원대 학생 특강과 기관평가도 하였다.
서점에 나와 있는 산업교육 강사편람이나 정부 인재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되어 끊임없이 강의 및 인증사업 심의 의뢰가 왔다.
기업에서의 영업 현장 실무 및 교육원 실무 경험은 백 퍼센트 활용되었다.
박사학위 논문 자료도 찾고 여행도 했던 미국 동북부에서의 방학생활은 잊을 수 없다. 엠허스트 UMASS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에서 찾을 수 없었던 840여 개 항공사 전략적 제휴 사례 자료를 찾고 많이 기뻐했다. 엠허스트 타운에 있는 대학에서 TESOL 영어강사과정과 주민을 위해 개설한 두 개 과정을 이수하였다.
공기업인 코레일 인재개발원 서비스아카데미 실장으로서 자리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운송산업이자 서비스산업인 항공사 출신으로서의 경험이 코레일에 접목되도록 하였다. 새로운 조직문화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즐거운 도전이었다.
회사의 배려로 한국항공대 겸임교수로서 일주일에 한 번 강의하러 다녔다. 4학년 학생들 항공운송산업론 수업은 나도 만족했고 학생들도 좋아했던 웃음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대학 졸업 하자마자 입사한 이후 20여 년 동안 많이 공부했고 많이 일했다고 자부했다. 이제는 좀 여유 있게 후반전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한 학교교육에 전념하고 싶었다. 물론 인생을 즐기고 늘 목말랐던 여행을 하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진입장벽은 높았다. 몇 년에 걸쳐 채용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다녔다. 무려 17개 대학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대전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합격 통지가 왔다. 47세 늦은 나이에 전임교수가 되는 사례는 흔치 않았다. 영어 강의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항공사 실무 경험자로 박사학위를 인정해 주었다. 다른 요구 조건은 없었다.
기업교육산업교육 실무 경험자로서 학교 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또 새로운 도전이었다. 나는 교육과 상관없이 학생들 하나하나가 전부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다. 다만 직장인 교육과 항공대에서의 교육에 비해 학생들의 기초학력과 동기부여가 부족하였다. 내 강의가 학생들에게 어려웠다. 나는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쉽게 가르치도록 애썼다. 단순한 지식부여 보다 칭찬을 통한 동기부여가 내 교육목표였다. 그리고 올바른 직장인의 양성에 맞게 직장인의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인 태도 인성 형성에 많은 공을 들였다. 공부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과 같은 말을 절대 쓰지 않았다. 나 자신 연구능력보다는 실무 전문가로서 교육 훈련에 적합한 역할이 스스로 맞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부임하자마자 각종 대학의 혁신 위원회에 불려 나갔다. 활발하게 의견을 피력하였다. 대기업 출신 총장이 부임하자 나를 취업처장에 임명했다. 나는 기업에서 하듯이 열심히 일했다. 일 년이 지나자 이사장과 총장의 갈등으로 학내 분규가 발생되었다. 그 후 총장은 학교를 떠났다. 학생만을 위한 좋은 교육훈련을 원했으나 대학도 하나의 조직체로서 갈등이 순수한 교육 열정에 장애가 되었다.
2005년 이후 정부의 기업 BEST-HRD 사업의 심사위원으로서의 활동은 기업에 대한 많은 현장 공부가 되었다. 공기업 국립대학 정부부처 및 기업을 심사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으로서 보람 있는 일이었다.
교수 정년에 가까이 오니, 학생들 이름도 빨리 못 외우고 수업 준비도 부실하고 그저 하던 말만 계속하는 거 같고 옛날이야기만 하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열정이 떨어진 게 확실하였다. 이는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항공분야가 학생실습과 취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닥쳤다. 은퇴를 마냥 연장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피해는 학생들이 입게 된다. 은퇴를 선택했다.
그리고 자유인 학습인 여행자로서의 시간을 엮어가기로 하였다.
2016년 3월 12일 10시 지리산둘레길 걷기를 위해 하동센터에 모였다. 차로 집에서 두 시간 반 걸렸다. 지리산둘레길 총 21개 구간의 첫 번째 구간 걷기였다. 2016년에는 단 두 번만 빠지고 전구간을 걸었다. 고등학교 첫 직장 대학 지리산둘레길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중요한 선택이었다. 5년간 주말마다 산길 마을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마음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평생 자식 키우느라 걸었던 어머니 생각을 했다. 자연에 대한 글도 써졌다. 바람과 비 계절의 변화 그대로 몸으로 맞으며 두 발로 땅을 느끼며 걷는 여행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들길 마을길 산길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이다. 길동무 말동무 밥동무가 생기고 그들과의 시간은 즐거운 만남이었고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