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uu Aug 19. 2021

일본 애니메이션의 책바보 캐릭터.

배를 엮다+개와 가위는 쓰기 나름.

 책을 각별히 사랑하는 역사적인 인물들, 쓰는 자인 동시에 장서가 또는 독서가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후대의 사람들에게 또 다른 책을 쓰고 읽고 보존하여 전하는 사명에 또 다른 영감을 주기도 한다. 장님이라 직접 책을 읽을 수 없었던 이유로 특별한 개인사를 갖게 된 작가 보르헤스는 "장미의 이름" 저자 움베르토 에코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사라진 한 편 "웃음"을 감추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완고한 확신범 호르헤 수사의 캐릭터를 만드는 완벽한 재료가 되어 주었듯이. 

  책의 운명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 사람, 천년을 버틴 책이 앞으로도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람, 실로 다양하고 나름 근거 있는 주장들이 많은 가운데 '사용자의 수'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텍스트(문자)보다는 영상 미디어의 시대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책의 실체를 종이와 잉크라는 물성에서 찾지 않고 'media'라는 본질에 비춰보자면 오히려 요즘과 같은 이야기 홍수의 시대에 더욱 정보를 찾고 해독하고 판별하는 힘이 중요한 시대, 따라서 여전히 유통되는 정보량의 대부분 형태를 취하고 있는 "문자"를 읽는다는 행위는 여전히 생존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래서인지 문자를 읽는 행위가 계속되는 한 책이라는 매체가 사라질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이 종이 책을 읽지-아니, 정확히는 '사지'-않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 찾기는
독자와 해결할 문제라기 보다 시대의 기술표준을 정하는 자,
공급자 등에게 그 힘의 방점이 찍혀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이야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 재미있고 새로운 것, 유용한 것,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갈망한다. 그것을 매개하는 미디어로서 가장 대표적인 old media였던 책의 역할을 한때 신문, 라디오, 다시 TV와 영화가, 지금은 유튜브, 넷플릭스가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 가운데에도 유난히 문자열에 대한 극한 애정을 변함없이 뽐내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다. 연간 국민들의 평균 독서량 언급에서 언제나 우리를 작아지게 만들던 이웃나라는 쇠퇴하는 경제, 극우화 되는 정치권의 저열함 때문에 그들이 가진 역량보다 많이 저평가되고 있으나 그들의 독서량, 취향 다양성, 독창성, 생산성 등을 기준으로 볼 때 예전만큼 주눅 들 것도 없지만 아예 낮잡아 볼 근거로는 좀 빈약해 보인다. 

   

  책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꼽아 보라면 1) 협회 만들기, 2) 만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을 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반대로 가장 못하는 것 : 1) 혁명 2) 원작 만화나 애니의 실사화.
(설명 : 성공한 애니의 실사화 재앙은 셀 수 없이 많은 선례를 남겼다. 다행히 "배를 엮다"의 경우 영화화 과정에서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안다. '배를 엮다'는 애니메이션 이전에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애니메이션으로 성공했다고 영화화 하지 말기를. 제발!)


 책, 더 정확히 말하면 말과 글에 대한 특별한 애착과 성실함을 차분히 몰아가는 "배를 엮다"의 주인공 -이름조차 성실한- 마지메, 그리고 책 때문에 죽고 책 때문에 환생한, 읽을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안고 사는 "개와 가위는 쓰기 나름"의 주인공인 극한의 독서가 하루미 두 캐릭터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 번 기록해둬야지 하면서도 쉽사리 쓰이지 않았다. 이유는 두 캐릭터에 못지않은 독서가 마키시마 쇼고(우로부치 켄 각본의 "사이코패스"의 최종 빌런)를 함께 언급하며 하나의 테마로 버무리기에 마키시마는 비뚤어진 사상가이자 기획자인 동시 유능한 실행가이며 테러리스트.... 즉, 전천후 사기 캐릭터라서 '책 바보' 카테고리에 넣기는 이물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마키시마를 빼야 하는데 그를 빼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독서가를 논하자니 아쉬움이 컸다. (마키시마를 빼버리면 도대체 누구의 독서 목록에서 그 재기 발랄한 스위프트, 조지 오웰, 필립 K 딕을 언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테마 안에 모두를 포함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나서야 간신히 하려던 이야기의 전말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미남형 빌런이자 스타일있는 독서가 마키시마 쇼고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첫 번째 인물 : "배를 엮다"의 마지메 미츠야.

  '언어의 망망대해를 건네주는 배'라는 의미를 담은 중형 일본어 사전 대도해(大渡海)의 제작을 위해 출판 대기업 현무서방(玄武書房)의 영업부 사원으로 있다가 사전편집부로 내부 채용 스카우트되었다. 도대체 이 대기업 출판사의 채용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기에 당초 이런 인물을 영업부로 발령할 수 있었는지가 오히려 신기할 따름. 

   정년을 맞은 편집자 아라키는 현무서방에서 사전 편찬만 30여 년을 한 전문 편집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뒤에 이을 편집자를 찾는 방법은 대상자에게 단어 하나를 갑자기 던져주고 그것을 정의해보라는 것. 

  "오른쪽…. 오른손, 왼손…. 북쪽을 향할 때 동쪽에 해당하는 쪽이 오른쪽. 그 외에도 보수적 사상도 오른쪽이라고 하고…." 

  마지메는 아라키에게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에 망설임은 아닌 신중함으로 생각을 정리해가며 오른쪽을 정의한다. 이런 습격에 가까운 시험을 무사통과한 그는 평소 월급의 상당부분은 다 책을 사는데 써버리는 것으로 추정되고 밥 먹을 때조차 책을 보며 혼자 먹는 경우가 많다. 언어학으로 대학원까지 나온 전공자. 그런 마지메를 영업부에서 사전편집부로 끌어오고 금방 사전이 만들어질 줄 알았지만 그 후 13년간 돈 되는 책들도 만드는 틈틈이 단어를 모으고 용례 카드를 만들며 장장 23만여 단어를 수집, 정의해가며 대도해의 편찬 발간의 그날을 준비한다. 그 긴 세월 동안 누군가는 떠나고 다시 새로운 사람도 오지만 -우리나라였다면 비교도 못할 정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을- 그 시간 동안 언어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 하는 핵심인력은 흔들림 없이 그 일의 중심과 변방에서 자기 좌표를 지킨다는 게 사실 가장 비현실적인 이 이야기의 놀라운 가정이다. 

  21세기를 사는 주제에 19세기 말에서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 같은 진지한 마지메 때문에 심경 복잡한 신세대 후배 기시베는 영업부의 니시오카에게 SOS를 치는데, "마지메라는 미로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찾아봐" 라며 등장하는 책은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 물론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은 아니고 마지메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그의 연애편지를 찾게 해주는 중간 장치 정도지만 상황과 원작 내용을 고려할 때 그 의도는 충분히 전해져서 원작 소설에도 같은 설정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애니메이션에서의 섬세한 연출은 참으로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고색 창연히 '무릎 꿇고 궁서체'인 연애편지를 보고서 "용케 이런 걸로 마음을 전했네"라 생각하며 마지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기시베는 정면으로 자신의 사수에게 사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 여기에 '사람이 사람과 이어지기 위한 수단(언어)의 지원군. 누가 뭔가 읽을 때, 글을 쓸 때, 말을 할 때, 그 언어들의 저편에 있는 발화자의 생각을 수신자에게 오해 없이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 답하면서 동시에 사전은 만능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언어는 생물이기에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해가서 현재 남아있는 말은 최초의 의미가 형해 되어 그 시작 지점의 의미는 전혀 알 수 없게 된 채 껍데기만 남은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망양(亡羊)의 말과 글 속에서 의지할 한 척의 배를 짓는 일은 동료, 후학들,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일. 결국 모든 사람이 서로 지지하고 보완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참으로 중요하지만 동시에 부질없이 느껴지는 사전 편찬 작업은 얄궂게도 완성 발간되는 즉시, 개정과 증보판을 준비해야 하는 영원히 미완성인 작업이라니, 위키피디아 같은 웹 기반 집단지성이 만들어내는 사전들의 어마어마한 유용함과는 별개로 오래, 시간을 두고 정제된 생각을 언어나 문자로 만나보기 힘든 요즘, 가끔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지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해외에선 자국어 사전을 그 시대의 권력자가 주도해서 편찬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국어 사전 편찬은 국가의 위신을 거는 국가적 사업. 반대로 일본에서는 공적기관이 주도해서 만든 국어사전은 없지요. 
-언해(言海)조차 오오츠키 후미히코가 거의 단일 개인으로 평생을 걸고 편찬한 근대 일본어 사전- 
일본의 관치 문화에서 이런 점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언어는 언어는 사람의 마음을 자아내는 재료인 만큼 자유로워야 하는데 만약 국가 주도로 편찬했다면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의하려는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겁니다. / 마츠모토 주간과 아라키, 마지메의 초겨울 정원에서의 대화 요약.


두 번째 인물 : "개와 가위는 쓰기 나름"의 하루미 카즈히토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애니메이션화 된 케이스인 "개와 가위는 쓰기 나름"은 엄청난 다독가인 고등학생 하루미가 불의의 강도사건 현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자동반사적으로 보호하려다 죽임을 당한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고로 죽기 직전까지 탐독하던 작가 아키야마 시노부의 일곱 가지 대죄 시리즈의 마지막 편 "색욕"의 완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을 수 없어 절규하다가 닥스훈트의 몸으로 영혼이 깃드는 일종의 환생 이후의 이야기이다. 코미디 개그 장르이기 때문에 섬세하게 작가의 작품세계를 설정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았고 이야기의 전개도 큰 세계관을 요하지 않는 두 사람의 만남 과정에 관한 특별한 장치 및 주변 인물, 소소한 사건에만 국한되어 있어 사실 진지한 오타쿠의 세계를 탐닉하는 노력을 했다거나 굵직하게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은 아니다. 또한 하루미가 읽는 책들도 대부분 상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책들. 다만 "문자열이 아닌 입체에는 자극받지 않으니 문자열이 되어 돌아와!"라든가 책을 통해 이미 작가의 세계에 깊이 공감하고 빠져들었다면 그렇게 행동(모르는 타인을 위해서라도 돕다가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등, 책 읽는 자의 마음가짐과 독서 자체의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독서가로서의 언급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한편 지독하고 집요한 독서를 통해 작자를 초월하는 독자를 구현하는데 집착한 나머지 약간은 유치한, 불필요한 대결 장면들이 자주 연출된 것은 좀 불만이지만, 개로 환생한 하루미와 아키야마의 일방적 대화 '사토라레' 설정은 많은 불편을 해결해준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를 위해 대신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개로 환생한 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끝없이 되뇌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아 괴로운 가운데 소리를 쫓아 찾아온 그녀에게 생각이 모조리 읽히는 설정이다. 

 기본 전제는 다르지만 동물과 작가의 동거를 기본 구조로 각자의 시선으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이야기 전개는 -유사한 책바보 겸 작가로서- "동거인은 무릎, 때때로 머리 위"의 미카즈키 스바루에게서도 익숙하다. 자기 안으로만 침잠하는 독서가의 조건으로 1) 부모가 있지만 그들은 이 독서가의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물리적으로 제거(우연한 사고로 일시에 조실부모) 2) 교우관계도 매우 한정적이고 에너지 효율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관계에 심하게 적대적 3) 부자는 아니어도 먹고 사는데 문제 없는 정도의 경제력은 해결되어 있다는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루미는 도쿄 시부야의 먼친척이 제공하는 숙소에 창고지기 겸 책관리인으로 묵으면서도 집에서 집세는 꼬박꼬박 받아챙겨 혼다서점에서 책을 산다.) 

  이 조건들은 모르고 볼 때는 몰라도 인식하고 보는 기성세대들에게는 아마 상당한 반감이 일 것이다. 성공의 뜻도, 인생의 목표나 자기 이외의 타인에 대한 배려 또는 의리도 없는 무지향과 자유의 독서에 대해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그게 뭐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 반감은 일본 문학에 대해 사소설류만 난무한다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가치관(engagement)과 같은 기원을 가졌다. 

 제목부터 일본속담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을 차용하고 있는데 매 화마다 표제 제목을 뽑는 방식도 제목과 동일하게 연속된다. 매 화마다 책을 읽는 즐거움, 일본의 동네서점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에피소드들이 다수 있다.

  성덕한 닥스훈트는 매일 자신이 생명을 구한 아키야마에게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동물학대를 당하고 있다. 라노벨에서는 충분히 설명되어 있으나 애니에서는 생략된 '이름까지 붙인 무시무시한 가위'를 차고 다니는 아키야마는 닥스훈트의 몸에 갇힌 하루미를 반려동물 이상의 의미로 생각하지만 표현은 코믹 설정에 맞게 적절한 수위로 줄타기를 한다. 

  하루미의 독서는 독서 그 자체가 목적이다. 명문고교에 합격하여 도쿄 시부야에 남으려 한 이유도 지방에 살면 신간 발매일에 맞춰 책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애착도 기실은 삶 자체나 가족보다는 읽고 싶은 책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뭐랄까, 목적으로서의 독서가 극단적이 되면 그 또한 그저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사한 습성을 가진 책 바보라도 마지메와 하루미의 차이는 읽는 즐거움이 향하는 곳이다. 궁극적인 즐거움, 유희가 '과정의 부산물'인지 '더 나아갈 곳 없는 종착역'인지의 문제. 

  조선의 대표적 다독/다작/다상량의 대표 르네상스인 정약용의 호학(好學)은 배우니 즐겁고, 즐겁다보니 더 열심히 배우고, 가지치기를 한 배움이 일가를 이루고 또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밑도 끝도 없이 읽기만 하면 얻는 것이 없고, 읽지 않은 채 짜내기만 하면 곤란에 처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 / 論語, 爲政篇) 교류 없이 홀로 읽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변화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읽고, 쓰고, 말하는 요소가 함께하는 책바보의 파급력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PS. 공교롭게도 마지메와 하루미의 성우는 모두 사쿠라이 타카히로. (내가 책을 좋아할 목소리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