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화를 세계에 알린 화가로 첫 손에 꼽는 몇몇 익숙한 이름이 있다. 대중적 인지도로는 이중섭, 비싸기로는 김환기, 박수근 또한 앞에 언급된 두 화가보다 먼저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회화도 상당한 고가에 거래될 수 있음을 알려준 1세대 예술가. 자신의 고유한 화풍, 특별한 질감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예술가의 무명시절이라면 예술가적 기행이나 자기 파괴적 방황, 미술교육 엘리트 코스에서의 활약, 그리고 이혼이나 가슴 아픈 이별 같은 파란만장한 인생사, 그리고 종국에는 병마와 가난, 요절 같은 드라마틱한 이벤트로 채워져 있을 것을 은근 기대하기 마련.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박수근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광복, 한국전쟁까지 험한 시절을 살았을지언정 그런 와중에도 비교적 평범하게, 아내와 자식을 위해 열심히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창신동 한옥집을 자가로 구매하는 등 소시민적 행복도 누렸다. 사실 예술과 가난, 가난과 병마, 병마와 불행한 죽음은 어렵지 않게 페어링 되고 쉽게 연결되는 일종의 이벤트 공급 체인이다. 이 전개가 너무 전형적으로 맞아떨어진 이중섭 화가는 가슴 아픈 일본인 아내 및 아이들과의 생이별, 미도파 백화점에서의 마지막 전시회마저 실패하고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연고자 없는 행려병자로 마지막 숨을 거뒀다. 어찌 보면 대중들에게는 이중섭 화가의 삶 쪽이 훨씬 떠올리기 쉬운 전형적인 예술가의 초상이다. 하지만 -유난히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인기가 있는 고흐, 고갱으로 인해-예술가라면 가난, 병마, 외로운 죽음 3종 세트와 함께 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생각은 판타지일 뿐이다. 박수근 못지않게 근면했던 마네의 경우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살면서 지적인 활동의 일환으로서의 그림을 추구하며 바이올린 연주로 기분 전환하는 이상적인 생활을 죽을 때까지 지켜갔다. 살아생전에 명성과 부를 모두 누린 운 좋은 예술가 모네는 평안하게 정원을 가꾸며 오래오래 행복한 작품 활동을 했다. 르느와르도 팔순 노인이 되는 과정에 시력도 문제가 생기고 손 마디마디는 관절염으로 그림체까지도 변했을 정도였지만 평안하게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의 화구들을 바라보며 "이제야 너희들을 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라는 말을 할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생에 대한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예술분야는 몰라도 최소한 크게 성공한 화가 그룹 안에서 만큼은 당대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산 이들을 많이 찾을 수 있고, 험한 시절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박수근처럼 잔잔하고 평온한 삶을 이어가면서 최고 경지에 닿은 예술가가 있어 참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힘든 시기에도 죽음과 사고, 재난을 비껴가며 힘들었지만 비참하지 않게, 좀 빈궁했지만 구차하지 않게 살아낸 이야기에는 뭔가 큰 위로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화가 박수근을 말하면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작가 박완서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미술계의 최고 수준 예술가와 문학계 최고 수준의 예술가가 미군 PX에서 한 명은 미군 초상화 그려주는 생활 화가로, 한 명은 호객행위 겸 통역을 하는 점원이었다니,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납득하기 좀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전쟁 직후 간신히 살아남은 서울의 번듯한 건물이래야 명동 포함한 4대문 안 식민지 유산들이 대부분이었고 산업도 서비스도 활성화되지 못한 농업국가면서 전쟁으로 3년 넘게 변변히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한 세계 최빈국.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번듯한 직업 갖기가 하늘에 별따기였고 춘궁기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그런 시절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 주둔에 거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던 시기의 PX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일개 군인 편의 시설이 아니라 그 경로로 미제 군수물자가 암시장으로 풀려나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이권과 기회가 오가는 중요한 돈의 경로였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비루한 형편에 없이 사는 시절, PX는 미군과 선교사 같은 휴먼 네트워크까지 연결된 첨단 문물의 창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잘 나가는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이해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시 PX의 위치가 현재의 명동 신세계 백화점.)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그 어렵던 시절에도 여성으로서 명문대학에 입학한, 자부심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생계를 위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미군 대상으로 초상화 나부랭이나 그리는 '간판장이들'을 한국의 예술가처럼 포장해 지나가는 이들(주로 미군)에게 그림을 주문하도록 호객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심히 비관했었다고 한다. 박수근 화가도 당시 이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많은 화가 중 한 명으로 그가 어떻게 박완서 씨와 친분을 쌓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예술전문 블로거 문소영 씨의 과거 중앙일보 기자 시절 기사에서의 짧은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박수근은 함께 일하는 곳에 총기 넘치는 어린 점원이 자기 연민과 삶에 대한 비관을 감추지 않고 상처받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며 -무슨 계기로 그럴 필요성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점기 시절의 국전에 해당하는 권위 있는 미술전시회에 출품했던 본인 작품 도록을 조용히 보여주며 자신의 그림을 소개했다고 한다. 간판장이들 틈에 진짜 예술가도 있음을 알게 된 박완서는 그날 이후 조금은 더 자신감 있게 호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의 화가 옥희도가 바로 박수근을 모티브로 그려진 인물. 물론 소설과 달리 박완서 작가는 고요하고 성실한 중년으로 접어든 예술가 박수근에게 직장에서의 친분 외로 다른 감정을 싹 틔울 일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이때의 인연으로 박완서 씨는 훗날 자신의 작품 "나목"의 표지 디자인으로 박수근 화가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을 쓰기도 한다. 문예의 거장과 미술계의 거장이 젊은 날 한 곳에서 생계를 꾸렸다니 그것 자체도 이야기 꺼리지만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주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박수근이 PX에서 번 돈으로 마련했다는 창신동의 한옥집 정경에 닿으면 하필 근로소득으로는 절대 이생에 서울 안에서 집 장만하기 글러먹은 이 시점, 그 어렵고 궁핍했던 시절에 대해 격세지감을 넘어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르느와르가 그린 소녀와 고양이. 고양이를 사랑한 화가, 피에르 보나르 작품들. 박수근 화가의 특별한 기법, 두툴두툴하고 오래된 자기 표면처럼 갈라진 질감은 유명한 그만의 시그니처이고 반복되는 그림 주제들은 농악, 길에 쪼그려 앉은 좌판 사람들, 여인, 우물, 빨래터, 시장통과 같은 그가 평소 늘 보고 접했을 흔한 시대의 얼굴들이었다. 가장 흔한 일상을 가장 비일상적인 그림체로 그려내는 화가의 작품들 중 아주 드물게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었다. 영락없는 코리안 숏헤어 턱시도. 햇살이나 빛의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운 늘 두터운 구름 낀 대기 색깔 같은 그림 안에서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표정을 부여하지 않던 화가가 왜 이렇게 고양이의 표정에는 이리 공을 들였을까. 더운지 추운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지루한 회색빛 화면에 붙들린 고양이는 심심한지, 외로운지, 그렇다고 행복한 지도 알 수 없게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오욕칠정으로부터 벗어난 무욕 무정의 상태처럼 보이기도.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고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유럽의 그림 속 고양이 들은 가장 고양이적 특징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순간포착의 주인공인데 비해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이 그린 한국의 코숏은 뚱하게 자신만의 공간과 영역 안에서 감정이나 느낌을 숨긴 채 투영하고 싶은 대상의 마음이 정하는 그런 상태에 있다. 모두가 춥고 배고픈 어려운 시절, 고양이도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을 테지만 온화한 생활인 화가 박수근의 화폭 안에서는 그냥 과장 없이 그 시절을 살아낸 그런 모습으로 있다.
사실, 박수근 화가의 작품을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많이,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고 이건희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박수근 화가의 작품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도 놀라운 데다 양구 박수근 미술관 소장 그림 말고도 여기저기에서 개인 소장했거나 다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까지 빌려와 정말 알차게 한 곳에 모아놓았다. (기획자에게 감사의 박수를.) 아직 못 보신 분이 있다면 덕수궁 현대미술관 온라인 예약하고 꼭 가보시길. 나도 이 기획전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