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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u Jan 25. 2022

노묘의 시간

7화. 집사의 잔재주

  14년 넘게 함께 살면서 제일 놀란 사건은 까망이의 항문낭이 터진 2020년도 연초의 일이었다. 밤새 잘 자고 일어났는데 내 옆에 붙어자던 아이들이 일어난 이부자리에 핏자국이 있었다. 아연실색하여 두 마리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멀뚱멀뚱하던 노랑이와 달리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까망이가 갑자기 배를 출렁출렁하며 잰걸음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냉큼 잡아 여기저기 살피니 엉덩이 왼편이 손톱만 한 터진 상처와 피, 그리고 언제부터 그랬던가 싶게 마치 원형탈모가 일어난 것처럼 상처 주변으로 털이 뿅~ 빠져있었다.

  응급처치를 하고 바로 병원을 향했다. 잔병치레 없이 살아온 아이들이라 어릴 때 기본 검사와 기초 예방접종을 제외하면 정말 오래간만의 병원 나들이여서 까망이는 이동장 안에서도 이미 패닉 상태. 나지막한 까망이 울음소리에 노랑이는 불안한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동장 밖에서 까망이 옆을 지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항문낭은 외상 없이 안에서 자연히 터지기도 한다는 의사 선생님 설명이었다. 안에서 깊이 곪지 않고 밖으로 터진 건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다. 항문낭이 대체 뭐란 말인가... 어린 시절 십여 년 넘게 개를 키웠지만 한 번도 이런 문제를 당면해 본 적 없던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항문낭은 양쪽에 있는 것이니 다른 한쪽도 미리 조치를 해야 하는지, 다른 한 아이는 아직 안 터졌는데 괜찮은 건지 질문이 이어졌다. 별로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어서 미리 안내하는 타입은 아니어도 질문에 대해서는 그래도 충실히 답하는 D 동물병원의 부원장님은 우선 터지지 않은 다른 한쪽을 미리 외과적으로 조치하는 건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항문낭을 짜는 방법은 인터넷 검색해보면 꽤 나올 거라면서.... 본인도 직접 하기는 내키지 않는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항문낭이 꽉 차기 전에 주기적으로 짜주는 것이 좋겠지만 동물들마다 배변의 상태, 장과 항문의 상태에 따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거나 생기지 않거나는 결국 복불복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야생 상태 동물들도 항문낭을 따로 짜주는 일 없이 잘 살아간다. 그럼 대체 왜? 수의사 선생님은 왜의 기전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하긴 나도 어깨 통증으로 회전근개파열 진단을 받았을 때, 심한 운동이나 노동강도도 높지 않은 사무직이 왜 어깨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를 물었을 때 의사 선생님에게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의료서비스는 대부분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지 원인의 기전을 밝혀 병의 근원을 아는데 관심 없다고 했다. 여러 이유를 그럴듯하게 둘러댈 수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모른다라는 것을 좀 더 직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그때는 황당했지만 곱씹을수록 정확한 얘기였다. 사람보다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동물의 상황이야 오죽하랴.

  일단 까망이의 경우 외상 면적이 크지는 않아서 별도의 상처 봉합수술까지는 하지 않았고 드레싱과 항생제 주사, 그리고 약 처방이 이어졌다. 2주 후 재방문 진료를 예정하고 2주 치 약과 소독약, 연고를 받아 돌아왔다.


  한 번도 고민 안 했던 고양이 상처 소독과 약 먹이기의 신공을 익혀야 할 순간. 외상 소독은 큰 문제없었다. 상처가 마르고 딱지가 앉기 전까지는 핥는 것을 막기 위해 카라를 씌워둘 수밖에 없는 게 좀 불쌍해서 그렇지 그 외에는 어려울 것 없었다. 그에 비해 약 먹이기의 괴로움에 대해 풍문으로나 들었지 내가 경험하게 될 줄이야. 가루약 먹이는 방법으로는 츄르 같은 간식에 섞는다던가 잘 먹는 습식사료에 섞는 것이 일반적이니 일단 그렇게 시도해봤다. 

  고양이의 후각은 개에 비하면 좀 약하고 사람에 비하면 X맨 급이라고 한다. 섞어놓는다고 다름을 모르지 않지만 성격 좋고 먹성 좋은 고양이들은 그냥 먹어주는 것일 뿐, 모르고 먹는 게 아니다. 평소에도 까탈 대마왕인 까망이는 '츄르에 약이 섞인걸 내가 모를 것 같냐?' 하는 눈초리로 가만히 앉아 밥그릇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젠장! 약 한 봉을 버리고 방법을 바꿨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작은 빈 캡슐들을 받아왔었다. 사람이 먹는 캡슐 절반 이하 크기의 작은 캡슐에 가루약을 꼭꼭 채우니 약 한 봉이 한 캡슐 안에 모두 들어갔다. 두 알 먹이는 것보단 쉽겠지. 옛날에 강아지들 약을 먹일 때는 입을 벌리고 캡슐을 쏙 집어넣은 후 주둥이를 꼭 쥐고 못 뱉어내게 하면 끝이었는데 강아지에 비해 뼈대도 가는 데다 몸이 너무 유연해서 고양이에게 그런 물리적 시도를 하는 것은 고려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까망이의 습관이 퍼뜩 떠올랐다. 제법 볼륨이 큰 이빨 과자를 씹지도 않고 삼킬 만큼 좋아해서 이것을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빨 과자 몇 개를 곱게 빻아 가루를 내고 이 가루에 마타타비 가루를 살짝 첨가한다. 이빨 과자 가루에 물을 한 두 방울 첨가, 절대 질어지지 않게 잘 반죽. 캡슐이 너무 젖으면 약이 밖으로 녹아 나오고 반죽이 지나치게 빡빡하면 캡슐에 붙어 성형 되지를 않는다. 집사의 잔재주는 이럴 때 매우 유용했다. 원래 과자 크기와 색깔에 비슷하게 성형하여 에어프라이어에 상태를 봐가며 구워냈다. 

  구운 상태에서는 냄새도 거의 똑같았다. 두근두근 하는 심정으로 까망이 앞에 내놓았다. 

  까독까독.... 거의 안 씹던 이빨 과자를 하필 왜 지금 씹는 거니! 하지만 여러 개의 과자들 중 약이 들어있던 알갱이는 무사히 꿀떡 삼켜졌다. 안도와 기쁨이 몰려왔다. 

  이렇게 유난스럽게 약을 먹여야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가루약을 섞은 습식 사료가 금방 물이 생기며 삭는 걸 보면 아이들이 잘 먹어주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인간의 대책 없는 기대가 아닌가 싶었다. 귀찮지 않았다. 약만 먹어준다면 더한 짓도 부지런히 할 의지에 불탔다.

   약을 제대로 먹이고 (다행히) 토하지 않으면서 고양이의 불평불만을 견디며 칼라를 벗겨주지 않는 둔감함만 장착할 수 있었다면 딱 2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까망이의 심한 분노 섞인 불평을 참지 못하고 가끔 칼라를 벗겨주고 (대신 내가 잘) 감시할 수 있다고 자신을 과신하다가 거의 다 딱지가 앉아 꾸덕해졌던 상처를 사포 같은 혓바닥 그루밍으로 사삭 벗겨내는 꼴을 당하기도 하고 약이 부대껴 구석에 토해놓은 약과 불어 터진 사료들을 치워야 하는 일도 겪었다. 

  결국 총 7주 동안 4번 병원을 갔고 첫 번째 방문에서 약값 빼고도 진료비만 12만 원, 다음 방문에서도 약값 포함 7만 원에서 8만 원이 꾸준히 들었다. 가슴으로 낳아 지갑으로 기른다더니, 별것 아닌 이런 잔병에도 거의 50만 원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겼다. 


   이 시점에 고양이 상처에 쓰는 소독약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다. 포비돈 같은 요오드계 소독약은 인수공용 사용이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범용으로 쓰이는 알코올과 과산화수소는 고양이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게 낫다. 인간보다 연한 살이라 특히 과산화수소를 사용했다간 영원히 고양이에게 미움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과산화수소는 단백질 파괴로 상처 부위를 지져 봉해버리는 원리라니 치료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인간은 견딜 수 있어도 고양이로서는 극심한 고통을 주는 고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병원에서 주는 드레싱용 소독약은 클로르헥시딘 2-3% 용액이었다. 이걸 소아과에서 주는 기침용 물약병 같은 것에 소분해서 주는데 이 30mg 좀 넘는 조그만 소독약을 병원에서는 5천 원에서 7천 원을 받는다. 소독약을 아껴 쓰는 건 정말 체질에 맞지 않아 알파헥시메딘 5% 용액 한 병을 구매해서 증류수와 비율대로 섞어 사용하는 편을 택했다. 남은 원액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증류수와 그때그때 섞어서 사용하면 되고 상처 소독만이 아니라 턱드름 닦아주기라든가 눈가의 잦은 스크레치에 가벼운 소독에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유용하다. 다만 동물의약품 취급 약국은 따로 검색을 해보고 찾아가야 하니 아무 약국이나 가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 참조하시길.


  그 후로 지금까지 까망이의 다른 한쪽 엉덩이는 매일매일 검사의 대상이다. 얼결에 노랑이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엉덩이부터 찾는 엄마 때문에 묘한 자세로 이부자리에 끌려든다. 

  "미안해~ 아가들. 엄마는 미리 항문낭 짜 줄 재주는 없지만 드레싱도 잘하고 약 냄새 안 나게 숨겨 먹이기도 잘하니까 용서해주렴." 


The End of 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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