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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u May 31. 2023

노묘의 시간

14화. 신피질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들.

   요즘도 광고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집 비운 집사대신 고양이나 강아지들을 위한 펫채널이 한창 광고를 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채널을 가입할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 화면에 뭔가 빠르게 움직이는 새나 벌레가 보이면 드라마틱하게 화면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어도 집중한 표정으로 그쪽을 응시하는 것은 분명해서 노랑이와 까망이가 TV를 본다는 착각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금세 깨달은 사실은 그게 의도적인 "본다"는 행위는 아니란 것이었다.  동체시력이 워낙 좋은 친구들이다 보니 눈앞의 자극은 그게 무엇이든 잠깐 반응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그러니 펫 TV 채널가입으로 얻을 것은 집사로서 뭔가 해줬다는 "내 마음의 안식"일 뿐, 애들 입장에선 집안에 우연히 들어온 날파리나 창밖의 것들 만도 못한 것일 가능성 90% 이상. 그렇다고 이게 진리는 아니다. 경험적으로 나의 고양이들은 그랬다는 것뿐.  


   지루함... 시간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동물에게 대입하여 지나치게 마음 쓰던 내게 가장 큰 위안과 깨달음을 준 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수의사 윤쌤도 아니고 냥신이나 미야옹철은 더더욱 아니었다. 현실 속 인물조차 아닌 드라마 속 남주 남세희(이민기 분)씨였다.  2017년 방영 당시에 본 것은 아니지만 "비밀의 숲"으로 쓸데없이 웅장하고 피혜해진 마음을 단번에 소시민스러운 아기자기함으로 달래 버린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남세희는 결혼 연애어플 개발 스타트업의 수석디자이너. 극단적인 감정에너지 절약주의자로 그의 머릿속 구조는 "좌 대출 우 고양" 즉,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하고 그 집의 대출을 갚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축이다. 그나마 그를 인간미 있게 만드는 존재는 고양이인데 원래 길고양이였던 아이를 냥줍 한 케이스였다. 처음 구조했을 때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비가 많이 들었다는 설정이었다. 스타트업에 한파가 밀어닥친 지금과 달리 5-6년 전까지만 해도 될 성 부른 스타트업에는 돈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남세희 씨는 시리즈 A 투자를 받은 데다 어느 정도 매출도 나기 시작해서 현금흐름이 좋은 유망한 스타트업의 고연봉자지만 워낙 번듯한 서울 시내 아파트를 급여만으로 장만하다 보니 대출 원금과 이자, 최소한의 생활비로도 빠듯하다. 그럼에도 고양이에 대한 지출 만은 필요한 수준 이하로 줄이지 못해 결국 방 하나를 세 놓기로 하고 그 세입자와 상당히 현실적 인척 고민하지만 실은 겁나 센 판타지로 드라마를 채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드라마와 이민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사이트 넘치는 대사들 덕분이었다. 

  여주인공 윤지호(정소민 분)가 나이 서른에 잘 안 풀리는 방송작가, 현재는 백수이며 방 한 칸이 절박한 자기 처지에 대한 깊은 푸념을 늘어놓자 남세희는 별 다른 감흥 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 짧은 문장에 서른이란 단어를 세 번이나 쓰다니, 신피질의 재앙이네요.

 
  "스무 살, 서른 살, 그런 시간 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두뇌의 바깥 부분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달리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매일 똑같은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란 현재 밖에 없는 거니까. 시간이란 걸 이렇게 분초로 나눠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서른도, 마흔도 고양이에겐 똑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고양이 집사 15년 차인 내게 이보다 더 큰 위로를 준 복음은 없었다.  정말 그런 거죠? 어릴 때는 박스 하나, 구겨진 종이하나로도 숨 가쁘게 뛰던 아이들이 7세 이후로는 장난감도 시큰둥. 레이저 포인터에는 그 후로도 한동안 반응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잡히지 않는 자극에 욕구불만이 커진다기에 레이저포인터로 뛰게 한 뒤 심심한 깃털낚시로 그립감 있는 사냥의 포만감을 주곤 했다. 결국 10세를 넘기면서 레이저포인터를 보면 레이저 점이 아니라 내 손을 공격하거나 눈 감고 풀썩 누워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점점 아이들에게 흥미를 일깨우는 것을 찾아주는 일이 고역이 되어갔고 어느 시점부터는 신묘한 빗질과 마사지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이란 별생각 없이 매일을 살다가도 문득 '오늘이 초복이네,  말복이네' 이렇게 시간에 금을 긋고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체의 움직임에서도 운명을 읽고 우주론적 시간 체계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거기에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인문적 시간 체계로 환원까지 하면서 24 절기 같은 피곤하기 그지없는 세시풍속을 만들어 행동을 가둔다. 외절로 삼복-초/중/말복과 설, 한식, 단오, 추석이 있다. 그러니 말복은 엄밀히는 24 절기와도 별개다. 쓰고 있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나.... 싶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건 너희들의 털코트 때문이 아니었어. 신피질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롭게 오늘만 사는 고양이. 그래서 너희는 그렇게 예쁠 수 있는 거구나.  

 

  예고 없이 갑자기 돌연사하는 고양이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떤 때는 외출도 좀 길어진다 싶으면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초조하다. 내 이런 신피질의 저주를 고양이들은 받지 않았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졸업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도둑까치처럼 그날이 오더라도 예쁘게 느긋하게, 고양이다운 우아한 오늘을 살자꾸나.

The end of this epis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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