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신피질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들.
여주인공 윤지호(정소민 분)가 나이 서른에 잘 안 풀리는 방송작가, 현재는 백수이며 방 한 칸이 절박한 자기 처지에 대한 깊은 푸념을 늘어놓자 남세희는 별 다른 감흥 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 짧은 문장에 서른이란 단어를 세 번이나 쓰다니, 신피질의 재앙이네요.
"스무 살, 서른 살, 그런 시간 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두뇌의 바깥 부분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달리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매일 똑같은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란 현재 밖에 없는 거니까. 시간이란 걸 이렇게 분초로 나눠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서른도, 마흔도 고양이에겐 똑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고양이 집사 15년 차인 내게 이보다 더 큰 위로를 준 복음은 없었다. 정말 그런 거죠? 어릴 때는 박스 하나, 구겨진 종이하나로도 숨 가쁘게 뛰던 아이들이 7세 이후로는 장난감도 시큰둥. 레이저 포인터에는 그 후로도 한동안 반응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잡히지 않는 자극에 욕구불만이 커진다기에 레이저포인터로 뛰게 한 뒤 심심한 깃털낚시로 그립감 있는 사냥의 포만감을 주곤 했다. 결국 10세를 넘기면서 레이저포인터를 보면 레이저 점이 아니라 내 손을 공격하거나 눈 감고 풀썩 누워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점점 아이들에게 흥미를 일깨우는 것을 찾아주는 일이 고역이 되어갔고 어느 시점부터는 신묘한 빗질과 마사지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이란 별생각 없이 매일을 살다가도 문득 '오늘이 초복이네, 말복이네' 이렇게 시간에 금을 긋고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체의 움직임에서도 운명을 읽고 우주론적 시간 체계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거기에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인문적 시간 체계로 환원까지 하면서 24 절기 같은 피곤하기 그지없는 세시풍속을 만들어 행동을 가둔다. 외절로 삼복-초/중/말복과 설, 한식, 단오, 추석이 있다. 그러니 말복은 엄밀히는 24 절기와도 별개다. 쓰고 있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나.... 싶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건 너희들의 털코트 때문이 아니었어. 신피질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롭게 오늘만 사는 고양이. 그래서 너희는 그렇게 예쁠 수 있는 거구나.
예고 없이 갑자기 돌연사하는 고양이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떤 때는 외출도 좀 길어진다 싶으면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초조하다. 내 이런 신피질의 저주를 고양이들은 받지 않았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졸업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도둑까치처럼 그날이 오더라도 예쁘게 느긋하게, 고양이다운 우아한 오늘을 살자꾸나.
The end of this epis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