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오팔빛

변화의 계절 속, 잠시 머문 평온

by 수잔

누구에게나 잠시 머물렀던

잊히지 않는 행복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빛깔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두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오팔은 각도에 따라 빛이 달라지는 보석이다.

푸른빛, 분홍빛, 노란빛이 뒤섞이며
마치 마음속의 감정이 변하는 순간들을 닮았다.

그 보석의 말은 ‘안락’.
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내 뒤에는 늘 비교와 순위가 따라다녔다.
성적이 곧 존재의 이유처럼 여겨졌고

매번 시험지를 받아 드는 순간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부모님이 기대어놓은 기준은 높았고

나는 그 기준을 넘어야 칭찬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문제집을 풀고
밤이 되어도 머릿속엔 틀린 문제들만 맴돌았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세상이 멈춘 듯한 한여름의 기억이었다.


그날은 여름방학이었다.

마지막으로 편안하고 나른했던 한여름.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고요하고 따뜻했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던 거실,
텔레비전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의 세계 속에서
토끼를 쫓다 신비로운 고양이와 대화하고

모자장수와 티타임을 가지는 앨리스를 보며
나는 세상 모든 게 잠시 멈춘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부드러운 바람, 서늘한 공기,
그리고 여름의 소리들이 한데 섞여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멈춰 있었다.

성적도, 불안도, 내일도 없었다.

나는 그저 앨리스가 뛰어드는 이상한 나라를 보고

조용히, 편안히 잠에 들었다.


그날의 나는 앨리스처럼

잠시 현실을 벗어나 나만의 세계에 머물렀다.

평생 이런 세상에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고요함을 사랑했던 10살의 나는

이 날만큼은 어떤 근심도 없었다.


이 기억은 내 어린 시절이 내게 준 안락함이었다.
아무 걱정도, 비교도, 두려움도 없는 완전한 쉼.
그 잠깐의 행복이 내 마음 어딘가 깊숙이 새겨졌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지금,

삶은 매일 정신없이 흘러가고

마음의 여유는 금세 사라지곤 한다.

시간이 지나며 세상은 점점 복잡해졌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의 연속,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상처 주는 말과

멀어져 가는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결국에는 마음이 지쳐버린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여름밤의 안락함을 떠올린다.
시원한 공기,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바람,
그리고 천천히 잠들어가던 그 시간의 고요함을.

그래서 나는 지금,
누구보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잠시의 평화를 찾아내려 한다.

초등학생의 내가 겪었던 그 기억처럼

지금의 나도 고요한 행복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밤은 어린아이에게 마냥 무섭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10살의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안이 멈추고

시원한 바람과 희미한 달빛이 나를 감싸주던 시간.

그래서 오팔이라는 보석의 여러 빛깔이
그때의 여름밤과 닮아 있다고 느낀다.

불안과 평화, 외로움과 행복,
나에게 밤은 그 모든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그 빛은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반짝이며
어린 나를, 그리고 지금의 나를 따뜻하게 감싸준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그 여름밤의 공기를 떠올리며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때 느꼈던 평온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음을 안다.

이제 나는 그 오팔빛을 닮은 어른으로 조금씩 자라 가고 있다.


그리고 삶에서 행복이란 결국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작고 빛나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수선화 도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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