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스톤과 겨울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비추는 희망의 빛

by 수잔

나에게 겨울은 언제나 유난히 길고 차가웠다.
2023년의 겨울은 특히 그랬다.
로스쿨 입시와 취업 준비가 겹쳐 하루하루가 숨 막히게 흘러갔고
모니터 불빛만 바라보다 잠드는 날이 많았다.

막막하게 결과만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이 불쌍했다.

이제 내 손을 떠난 일들을 붙잡아보려

하루하루 간절함 한올씩 꼭 쥐고 있던 나였기에.

하루의 끝마다 느껴지는 건 피로가 아니라 공허였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한 길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계획표 속의 ‘해야 할 일’들만 내 하루를 채워갔다.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겨울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은 겨울에 찾아왔기에

난 너무나도 겨울이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마음을 달래려 무심코 틀어놓은 영화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멈춰 섰다.

<어린왕자> 였다.

화면 가득 펼쳐진 노란 사막,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장미,
그리고 어린왕자의 목소리.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그 한 문장이 내 안 깊은 곳에 닿았다.

공부도, 스펙도, 결과도 아닌

무언가 더 중요한 게 분명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상하게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어린시절의 내가 그립기도 했다.

태플릿을 키고 나만의 그림 공간에 들어갔다.


색연필을 꺼내 어린왕자와 장미, 그리고 별을 그렸다.
하얀 종이 위에서 사막의 노랑과 하늘의 푸름이 번져나갔다.
그림 속의 세계는 현실보다 훨씬 따뜻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내 안의 어딘가가 천천히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밤마다 그림을 그려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반짝이고 고요하지만 어딘가 신비로운 사막,
유리관 속 붉은 장미, 그리고 어린왕자의 친구 여우.

펜 끝에서 색이 번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도 빛이 퍼졌다.
모래빛 노란 빛, 장미의 붉은 빛, 여우의 주황 빛,
그리고 문스톤 같은 희미한 푸른빛.
이 반짝이는 색들은 서로 섞이며

내 안의 불안과 외로움을 천천히 덮어주었다.

여우와 함께 누워 있는 어린왕자를 그릴 땐
왠지 모를 평화가 느껴졌다.
그림 속의 별빛 아래에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쉬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도, 현실의 무게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다음날도 나는 어린왕자 영화를 틀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여우와 어린왕자가 수많은 푸른 달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잠시 괴로움이 멈췄고

마음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차가운 겨울인데도 이 순간 만큼은 행복했다.

꿈많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 것 같았다.


베란다 밖은 달빛으로 가득차있었다.

이날은 달이 참 크고 밝았다.

내가 달을 보고 있을 때 영화 속 어린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말이었다.

그 순간, 참아왔던 감정들이 터져나왔다. 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애써 버티며 매 순간을 간절하게 살아보려 노력했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그린 어린왕자 일러스트를 보며 한참을 울었다.

어린왕자 영화가 끝을 향해 달릴 때 즈음

난 울음을 멈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울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표현은 이런 상황에 쓰나보다.

평온해진 나를 마주한 끝에 나는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전보다 그림 잘 그려졌다. 이 순간 난 정말 행복했다.

어린왕자가 나에게 '조용한 행복'이라는 선물을 안겨준 것처럼

그림을 그린 후 스탠드 불을 끄고

나는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때로는 행복하기 위해 울음이 필요하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눈물이 마른 자리에 찾아온 평온 속에서

난 그림을 그리며 행복했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나는 잠시나마 나를 쉬게 할 수 있었다.





수선화 도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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