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시스트 숲의 여우

내가 만들어낸 세상

by 수잔

대학교 졸업 후, 예상보다 길어진 공백은

나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떨어지는 자존감과 나를 갉아먹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시간,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시간 속에서

나는 점점 말이 줄고 어떤 도전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심코 집어든 노트북 펜슬로

노트북 화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소 그림 그리는 것을 정말 좋아했지만

색연필, 물감, 종이의 질감에 익숙했던 나에게

노트북 화면은 어쩐지 너무 매끄럽고 낯설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디지털 드로잉 프로그램만 설치해 고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날은 왠지 무언가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전문장비 없이 내 손에 있는 건 노트북과 펜슬이었다.

막연한 시도였지만 두렵기보다는 두근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디지털 드로잉 프로그램을 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선을 그었고

그 선 위에 천천히 색을 채워 넣었다.


내가 디지털 드로잉으로 처음 만들어낸 세상은

고요하면서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의 숲이었다.

그다음 나는 숲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겹겹이 쌓인 나뭇잎들로 우거진 덤불,

덤불 위에 아름답고 슬프게 피어난 아네모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인 붉은여우.

나처럼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우는

아네모네 꽃이 피어있는 덤불 속에서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나를 또렷하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처음 해본 디지털 드로잉이었다.

내가 처음 만들어낸 나만의 숲이었다.

완성된 그림 속 꽃과 여우는 정말 예뻤다.

무언가를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이 대견했고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세계가

현실로 옮겨져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행복을 되찾은 느낌이 들었다.

펜슬 끝에서 피어난 숲 속의 여우를 바라보며

나는 오랜만에 진짜 내 모습을 마주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림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려왔다.

상을 받거나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였다.

어른들의 인정을 받을 때 누구보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렸던 건 그저 그런 한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디지털 드로잉으로 만들어낸 결과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 아니고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기 위한 결과물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서, 내 안에 살고 있던 고요한 숲을 그렸다.

이 순간의 벅참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나를 순식간에 행복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해서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린 첫 순간이었다.

이 꽉 찬 행복은 그림에도 담겨 있었다.


그동안 현실의 무게에 눌려있었던 나,

외부 세상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숨겨두었던 나.

그림을 그리며 여우와 마주하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잠시 조용히 옅어졌다.

나는 이 그림 파일명을 '아메시스트'라고 저장했다.

아메시스트가 말하는 순수함, 창의성, 안정을

이 그림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실 속에서 잊고 지냈던

숲과 여우를 좋아했던 나,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

고요한 숲 속에서 여우를 통해 바라본 진짜 나였다.






수선화 도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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