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
어느 때보다도 햇살이 따뜻했던 날이었다.
조그마한 4살짜리 여자아이가 뽈뽈거리며
공지천 산책로를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짧은 다리가 바쁘게 움직일수록
자주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그 아이의 할머니는
작은 그림자라도 놓칠세라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는 할머니의 존재를 느끼며
4살짜리 꼬마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작고 힘찬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초록색 나뭇잎에 둘러싸인 나무를 비추는 햇살이
아이에게 반짝이는 초록색 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만큼 기분이 좋았던 날이 있었을까.
여동생이 태어난 날 빼고
그 아이에게 행복했던 순간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맞는 햇살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물결 위로 번져 나갔고
봄 햇살은 나뭇잎에 부서져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집에 돌아온 후 꼬마는 우연히 할머니 방 서랍 속에서
까만 보석함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자아이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은 건 초록빛깔의 옥반지였다.
할머니가 늘 끼고 있던 옥반지였다.
아직 어린 손가락에는 헐거워 자꾸 빠졌지만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 손을 들어 보았을 때
투명한 초록빛은 숲 속을 거니는 듯 마음을 적셨다.
그 아이는 보석의 주인이 된 듯 기뻐하며
반지를 끼웠다 뺐다 하기를 반복했다.
할머니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그 보석함을 당신의 손녀딸에게 주겠다는 말을 남기며.
꼬마는 그 웃음에 힘입어 더 깊은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아이는 언젠가 자신도 진짜 어른이 되어
이 반지를 꼭 맞게 낄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그렇게 공지천을 누비며 뛰어다니던 아이는
어느새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다.
조금은 키가 자라고 말도 많아졌지만
늘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유치원에서의 하루는 꼭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이에게 가장 소중했던 초록색 끈끈이 장난감을
한 남자아이가 억지로 빼앗아 간 적이 있었다.
작은 몸으로는 힘이 모자라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저녁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다음 날 곧장 유치원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다시는 우리 손녀딸 괴롭히지 마. 또 그러면 할머니가 혼내줄 거야.”
이 기억은 지금까지도 ‘보호’라는 단어와 함께 선명하다.
할머니는 사촌들이 아이를 괴롭힐 때도,
주변 어른들이 아이의 기를 죽일 때도
언제나 이 작은 꼬마의 편이었다.
아이는 할머니가 곁에 있으면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았다.
그 든든함은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이어졌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던 길,
할머니가 동네 어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갈색 푸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눈은 단번에 강아지에게 사로잡혔고
빨리 가보고 싶어 할머니 손을 힘껏 잡아끌었다.
보채는 손길과 반짝이는 눈빛에
할머니는 대화를 멈췄다.
강아지를 향한 아이의 발걸음은 한없이 성급했지만
그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는 할머니의 걸음은
늘 한결같고 따뜻했다.
결국 그날 강아지를 만지지는 못했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뒤돌아보며 집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울상이었던 아이는 초록빛 햇살을 받으며
어느새 다시 행복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인지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순간 같다.
아마도 강아지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보다
내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온기,
내 마음을 지켜주던 든든한 존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햇살과 웃음소리가 물결 위에 번지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내 안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내 어린 시절 속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저 할머니가 내 옆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안다.
언젠가부터 할머니의 초록빛이 사라졌을 때
세상은 너무나도 차갑기만 했다.
그러곤 차차 어른이 되어가면서 내 편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 넓어졌지만
마음을 온전히 기대어도 된다고 느끼는 존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가 내 손을 다시 잡아준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고,
그러니 기죽지 말고 열심히 다시 살아가라고.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날의 따뜻함이
내 마음속에 옥처럼 초록빛으로 반짝이며 떠오른다.
내 어린 시절은 늘 그 빛 속에 있었다.
공지천을 달리던 작은 그림자,
초록빛으로 반짝이던 옥반지,
유치원 앞에서 단호히 내 편을 들어주던 목소리,
강아지를 향해 가기 위해 내가 끌어당겼던 손.
그 모든 순간들이 한결같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