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이 남긴 트라우마와 싸우기
한 연예인 때문에 가스라이팅이 이슈가 되었을 때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이 보이는 증상을 소개하는 유튜브가 많았다.
가스라이팅 진단을 위한 여러 질문들 중 나는 한 두 개를 제외하고 모두 다 해당되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상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것과 내 안에 자기 비난의 목소리였다.
나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자책이 심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에 대해서는 유독 더 확신이 없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욕구를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자책하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기도해 주시던 분과 대화를 나누던 중 새어머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분이 새어머니께서 무슨 말을 자주 했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본인이 나를 할 테니 나더러 새어머니 흉내를 좀 내보라고 했다. 웃으면서 시작된 반장난이었다.
그런데 잠시 대화가 오고 가다가 나도 모르게 새어머니의 눈빛, 말투, 말을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다. 나도 그분도 둘 다 놀라서 얼음이 되고 말았다.
그분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내 마음속에서 비난과 자책을 하는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라 새어머니의 목소리 같다고.
내 안에서 나를 비난하는 게 내가 아니라고? 그렇다. 어려서 들었던 감당할 수 없이 아팠던 말들이 내 무의식에 심겼던 것이다.
그 가시를 뽑아내야 평온하게 살 수 있다. 흉터는 어쩔 수 없겠지만, 가시가 박힌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후 3년 간 상담공부를 했고,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가스라이팅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급히 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담사님은 마음에 박힌 말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도록 도와주셨다. 무조건 수용해 주시면서.
“비를 흠뻑 다 맞고 서 있는 어린 ㅇㅇ씨가 가여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배려심 깊고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게 정말 기특해요. “
그 말에 비로소 어린 내가 보였다. 너무나 가여웠다.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가여워서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늘 어머니와 언니•동생을 희생시켜 내 욕심을 채우는 이기적인 아이. 제 분수를 알아야 하며, 욕심부리지 않아야 하며, 주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아이.
그리하여 어머니께 받은 것을 어머니와 언니와 동생 모두에게 갚아야만 하는 빚쟁이 아이. 그런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홀로 서 있는 아이.
그래서 나는 내가 무슨 잘못하면 버림받아 마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배은망덕할, 머리 검은 짐승이라며 그토록 비난을 쏟아부웠다. 어머니의 언어들로 내가 나를 비난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실수로(절연 편) 연락을 끊었지만 살려고 어머니와 연락을 끊었다. 더 단단해지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와 연락을 끊은 초기 몇 년 동안은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오실까 봐 겁이 나서 잠이 오질 않았다.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황당한 내용의 카톡이 왔을 때는 진심 분노가 치밀었다.
어머니께서 가스라이팅이 무엇인지 아실리가 없다. 어머니의 생존과 당신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필살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여자로서 안타깝기도 하다.
나는 책을 읽고 주변에 여러 엄마들을 관찰했다. 이후 새엄마라서 그렇지 하고 생각했던 어리고 좁은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그런 성향은 가지고 있다. 다만 알고 조심하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친어머니에게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듣고 살아가는 아들, 딸들도 많다. 만약 내게 그런 분이 새어머니가 아니라 친어머니셨다면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차라리 남이라서 낫다 생각한다.
한국엄마들 대다수의 필살기가 가스라이팅이다. 또한 종교인, 가르치는 사람, 기업인, 정치인 등 윗분들 대다수가 흔하게 저지르는 범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인간을 가스라이팅하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상대의 자아와 자존을 처참히 무너뜨리고 그 사람 안에 폐쇄적인 성을 짓는다. 그 성에는 오직 가스라이팅 가해자만 들락거릴 수 있고 피해자는 그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엄마들은 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 너 잘 되라고 그러잖아! 내가 나 위해서 그래?”
“너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니?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돼!”
낮은 자존감과 자기 비난,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대한 불확신 등의 쓴 뿌리를 마저 다 뽑아내기 위해서는 반복된 훈련과 건강한 생각의 습관이 필요했다.
상담소에서는 나에게 우울증과 공황이 있고 불안도 높다고 했다. 예상한 결과였다. 독서, 사색, 샤워, 기도, 여행, 나에게 선물하기, 안아주기, 그림 그리기, 산책하기 등등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만 찾아 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대방 눈치가 보여서 하게 되거나, 가족들의 마음이 변할까 봐 하는 모든 행동과 헌신을 멈춰야 했다.
그렇게 늘 애쓰는 삶이 내려놔진 것이다. 한마디로 내키는 대로, 대충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관계도 있고, 여전히 함께인 인연도 있다.
“내가 형편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단 말이야? 공부를 잘하거나, 돈을 잘 벌거나, 말을 잘 듣거나, 예쁘거나 뭐든 내가 잘해야 사랑도 받는 거 아니야? “
나는 초중고 시절 부모에게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 효능감만 있지, 나의 존재 자체에 가치를 부여할 줄 몰랐다.
하루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롤러장에서 놀다가 집에 오는 길에 길이었다. 위험하고 큰 도로를 건너야 해서 동생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있었는데 동생이 잽싸게 달려 나갔다. 큰 트럭이 동생을 날려 버렸다. 한참을 날아가서 멀리 떨어진 동생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내게 달려와 안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운전하신 분이 일단 병원으로 가보자고 했다. 일을 가신 어머니께 연락을 하고 일단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트럭에 치여 그렇게 날아갔는데 골절도 없다며 기적이라고 하셨다. 일을 마친 어머니께서 부랴부랴 달려오셨다. 놀랐을 동생을 품에 안고 한참을 달래다가 동생이 잠이 들자 내게 말씀하셨다.
“00 이가 죽거나 다치면 나는 너도 안 키운다! 앞으로는 동생 잘 봐라!” 그날 나는 동생을 잘 보살피는 일이 내 생존과 직결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부터 나의 존재가치는 없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안에 내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아무도 모르는 고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나 스스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던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도 문득문득 밀려오는 우울감 때문에 몇 날 며칠 무기력하기도 하고, 공황과 불안 증상 때문에 잘 가던 여행이나 사람 많은 곳에서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다.
차차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자. 앞으로 더 잘 되기 위해서 마음 훈련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되고, 무조건 내가 나의 편이 되어주면 된다. 이보다 더 힘든 일도 견디며 살아온 삶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