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이해, 그리고 깊어지는 그리움
나는 첫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한 달 앞두고 아무 준비 없이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다. 허기사, 그때의 나는 준비할 시간이 있었어도 마음이 곱지 않아 준비를 안 했을 것 같다.
들기름을 짜서 보냈다는 나와의 통화가 아버지의 살아생전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들기름이 배달되어 온 그날, 나는 고모에게서 홀로 지내시던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들 반대하는 속에도 나는 꿋꿋이 기독교장으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작은아버지들과 고모들은 그것이 탐탁치 않아 욕을 하며 밖에서 서성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고모들과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러 시골집에 갔다.
아버지의 금 목걸이 열 돈은 이미 작은 고모가 챙기셨다. 본인이 해준 거라며 그 목걸이와 함께 몇 벌 안 되는 비싼 옷도 몇 장 챙겨갔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걸 입을 건가?’
타시던 오토바이를 정리하고 은행잔고를 정리하고 갖고 계셨던 14k 금반지 하나를 정리했다. 통장 잔고는 600만 원이었다. 그게 아버지의 전부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시골집 마당에 들어선 날, 아버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그 고독이 마치 깊고 어둡고 차가운 바닷물처럼 내 온몸을 적셨다.
그 뒤로 나는 10년 넘게 시골집에 가지 못했다. 애써 아버지의 죽음을 떠오르게 하는 시골집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겨울의 끝인가 봄쯤인가, 초등 고학년이 된 큰 아이가 엄마 어려서 살던 시골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인 것 같다.
마당 입구부터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쌓여 있었고 문은 뜯겨 나갔으며 아버지가 주무시다 돌아가신 방 위의 지붕은 내려앉아 있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집이다.
그런데 마당입구에 전에 보지 못했던 동백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가 심어둔 것이다. 그 동백꽃이 빨갛게 피어 우리 가족을 맞아 주었다.
문득 동백꽃 꽃말이 궁금해졌다. 알고 심으셨을 리 없고, 그저 좋아서 심으신 것이겠지만 나는 꽃말이 궁금했다.
붉은 동백꽃, 꽃말은 그리움이란다. 나와 사위와 손녀들이 그리우셨을까? 아니면 나를 낳아준 생모님이 그리우셨을까, 20년을 살고 당신을 버리고 떠난 새어머니가 그리우셨을까? 그도 아니라면 당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그리우셨던 것일까?
숨겨둔 열쇠로 잠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에는 마치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아빠한테 써드렸던 편지, 보내드린 아기 사진, 아버지가 듣던 카세트테이프(뽕짝 메들리)등등이.
나는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서둘러 나와버렸다. 마당을 서성였다. 남편은 그 뒤로도 한참 더 뭔가를 뒤적였다.
남편이 놀란 토끼눈으로 돈뭉치 한 다발을 들고 나왔다.
“여보, 장인어른이 생활비로 쓰시려고 현금으로 찾아둔 건가봐. 70만 원이 항아리에 들어 있더라고.”
만 원짜리 70장이 잘 포개져 있었다. 그 돈을 받아 들고 눈물이 났다. 흑수저 중에도 최저급이라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미워했던 나였다.
‘아빠가 나한테 주는 온전한 내 몫이라고? 그럼 이 돈이 아빠가 준 유산인가?’ 인생은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들기름도, 동백꽃도, 그 돈도 다 그렇게 나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과 사랑으로 해석했다.
나는 그 돈과 동백꽃을 보고 비로소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부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온전히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그 돈을 건네주었다.
“여보, 이건 장인어른이 당신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인 것 같아. 내 몫이 아니고 당신 주라고 남겨두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