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피는 물보다 진하더군요
작년 추석이었다. 남편은 전세 보증금으로 올려 받은 2천을 주식으로 날렸다. 혹시 몰라서 큰 아이의 등록금이라고 꼬리표를 붙여줬는데도, 이 인간이!
나는 장장 19년 간 주식에 시달렸다. 큰돈은 날린 적 없다고 하겠지만 매달 야금야금 주식으로 들어간 돈과 이자 덕분에 빚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급기야 사건이 터진 작년 추석, 또 나 몰래 돈을 날리고도 몇 개월 비밀을 유지하다가 갑분싸 고백을 했다. 고민할수록 이러다가는 평생 빚만 갚다 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은 극단적인 생각이 나를 집어삼켰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막막해서 이혼을 해야겠다 다짐했다. 남편에게 이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아이들의 양육비로 각각 100 만원씩을 요구했더니 진심을 다해 T로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비웃음이 나왔다. 주식이 떡상하는 건 가능할 것 같고?!!?
그렇게 때로는 불 같고 때로는 시베리아 같은 전쟁과 냉전이 몇 주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온종일 연락이 안 된 남편. 밤이 늦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다. 딸아이가 할머니께 아빠 거기에 갔냐고 묻자 안 왔다고 하시면서 당신 아들 걱정을 하셨나 보다.
너희들 그러다 아빠가 나쁜 생각을 하면 어쩌려고 그리 몰아세우냐고 하셨다고 한다. 딸아이가 그 말에 먼저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 아빠 안 죽어요! 저도 엄마, 아빠 누가 더 잘못한 건지는 알아요. 이 건 아빠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거잖아요. 그 일로 엄마는 며칠 째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하면서 힘들어하는데 엄마는 좀 어떠냐고도 먼저 물어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딸아이가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끝까지 며느리 안부는 안중에도 없으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내가 겨우 그런 대접받는 며느리 하려고 그리 애를 썼던가? 나는 어머님 교회에서도, 우리 교회에서도 딸 같은 며느리(?)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나에게는 친정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분들이 아니셨던가??
친정이 없는 거나 다름없던 나에게 정서적 안전지대는 늘 시댁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사건 이후로 시댁도 어려서 차별받던 친정과 다를 게 없는 곳이 되었다.
나의 뇌가 여기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자꾸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시부모님 눈치가 보이고 주눅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느 며느리들처럼 나도 그날 이후로 시댁이 가기 싫어졌다.
시댁도 엄마가 있는 철부지 남자아이와 경쟁해서 사랑을 받아 보겠다고 노력해야만 하는 광야,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광야. 나 스스로 생존해야만 하는 미지의 야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그 일이 있고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노력해서 시댁에 갔다. 딸아이가 어머님께 그날 아빠 걱정만 하셔서 할머니께 섭섭했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래지더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어려서 그토록 애써서 얻으려고 했던 새어머니의 사랑과 시어머니의 사랑이-꼭 자기 피여야만 진한 그 사랑이-무늬만 다를 뿐 그 두 가지 사랑이 같은 종류의 것이고, 별반 다를 것 없는 맛이 난다는 사실을 비로소 또 깨달은 것이다.
인생머니 게임?? NoNo!!
내게는 인생 엄마 게임이다!
이건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그냥 언제나 엄마 있는 놈이 무조건 이기는 게임 같은 거다. 친구들이 가끔 엄마가 뭐 해주셨다는 말을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래, 엄마 있는 네가 이겼다!”
남편은 결혼초부터 시부모님께 그렇게 까지 애쓰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늘 내 수준에서 나는 넘치게 해 드리고도 부족한 것 같아 자책을 했다.
시댁도 늘 내가 먼저 가자고 했고, 매일 음식을 해서 바치는 옛날 며느리는 못되지만 명절에는 꼬박꼬박 전을 부치고 김장철에는 김장을 담갔다. 여행도 내가 먼저 모시고 가자고 해서 자주 다녀왔고.
그런데 그 모든 애씀이 결국은 또 부모님의 빈자리에 시부모님을 앉혀두고 정성껏 ‘비나이다 비나이다’ 염불을 한 꼴이 된 것이다. 이렇게 바랐을지도 모른다.
“제발 나의 친부모님이 되어주세요! 제발 나의
편이 되어주세요!”
이후 맺힌 마음을 풀어보려고 어머님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돌아오는 말씀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았다.
“00네한테 더 미안하지. 너네한테는 내가 해줄 만큼 해줬어! “
원망이 이내 터져 나왔다. 나도 내게 피를 주신 어머니가 아니라서 세상 모든 자식들이 다 듣는, 별 것 아닌 저 말이 이토록 마음에 맺히는 건 아닐까?
우리에게 집을 사주셨던가?
우리에게 차를 사주셨던가?
아들을 대학을 잘 보내셨던가?
부모가 대체 얼마나 다 해줬으면 저리 당당하게 해 줄 만큼 해줬다는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 그간 살면서 시부모님께 서운한 적 없었은데 원망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 그간 감사했던 모든 마음이 시커먼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새어머니도 그랬다. 시어머니도 그랬다. 너는 내가 이만큼 주는 사랑에만 감사하고 더 욕심내지 말라고 한다. 나는 네게 줄 만큼 해줬다고 한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도 이제 새어머니의 사랑과 시어머니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죄송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당신들의 딱 그만큼 사랑에 배가 부른 적 없었다. 오히려 더 갈증이 났다.
나는 엄마가 없어서 내가 이기고도 패자라는 걸 깨달았다. 승자를 결정하고 편을 들어주러 오는 건 언제나 엄마들이기 때문이다. 그 안전지대는 피로만 지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안전지대가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길러주신 우리 할머니가 그 안전지대였다. 인생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아기에 할머니의 그 안전가옥에 있었다는 게 내 생에 얼마나 다행이고 정서적인 구사일생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내가 누구를 때렸든, 맞고 왔든 무조건 내 편 우리 할머니. 동네에 엄마 없는 애는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늘 내가 제일 불쌍해서 업고 다니던 우리 할머니.
명절을 지내러 사촌동생들이 다녀가면 먹다 남긴 사탕, 라면, 요구르트, 과자 등을 소쿠리에 꽁꽁 숨겨뒀다가 두고두고 나만 먹이던 우리 할머니.
변소 가는 거 무서운 꼬맹이 때문에 매일 요강을 비워 마루에 놔주시던 우리 할머니.
그래서 나는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 그 안전하고 순도 높은 사랑을 수혈받았으므로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 아플 때마다 꺼내보고 추억할 사랑이 있기에 더 단단하게 성장할 것이다.
할머니의 그 붉은 산수유 열매가 여전히 내 몸에 사랑으로 알알이 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