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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숙 Aug 05. 2023

아, 우리 거제야!

아버지의 노래

         

나의 고향은 거제도이다.     

아들만 많은 박 씨 집안에 귀한 첫딸로 태어났다. 큰아버지께선 당신 딸로 삼고 싶어 하셨다 한다. 집안에서 여섯 번째로 딸을 낳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아버지께선 배를 타셨다. 고등어잡이 선장으로 무서운 파도와 평생을 싸우셨다. 오랜만에 집에 오시는 아버지는 제주도 귤을 박스 채 사 오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우리 집에 먹을거리가 넘쳤다. 그때는 무뚝뚝하신 아버지가 낯설기도 했지만 친구들에게 살짝 자랑도 하고 싶었다.


 고향을 생각하면 여름밤의 평상과 흑백텔레비전이 생각난다. 여름밤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연속극과 김일 박치기 프로를 보러 왔다.  동네 사람들과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연속극을 보았다. 가끔 정전이라도 되면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겨울엔  우리 집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봤다. 방안 가득 고약한 발냄새를 참아야 했다. 보건소에서 이빨을 뽑은 날엔 더욱 참기 힘들었다. 치통에 발냄새까지 죽을 맛이었다.

엄마는 찬물을 입안에 머금고 있으면 좀 낫다고 하셨다. 입안에 머금은 찬물은 금세 더운물이 되었다. 그렇게 연속극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 했다.    

 세월이 이렇게 흘러 멀지 않은 내 고향 거제를 하루 여행으로 다녀오기도 한다.


“거제의 자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거제의 선각자 무원 김기호 선생의 작품으로 6.25 전후 불리었던 노래라고 한다.    '거제의 자랑'을  아버지가 즐겨 부르셨다.

 지지난해  폐암으로 천국 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움이다 이것은.

아버지 성품은 낙천적이시며 유머를 좋아하셨다. 돌아가시기 6개월 전쯤 아버지와 우린 이 노래를 부르면서 거제를 갔다. 할머니, 큰 아버님 산소를 둘러보시고 큰집 뒤뜰도 둘러보셨다. 마지막 인사를 하신 것이다. 먹먹한 가슴으로 아버지를 부축해 드렸다.     

‘거제의 자랑’ 노랫말은 이렇다

 1월부터 12월까지 거제 자랑거리를 늘어놓고 후렴으로 ‘아, 우리 거제야!’를 힘차게 다 같이 불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선창 하시면 우린 후렴을 다 같이 불렀다.

     


 “정월이로다. 정든 땅 어디던고 내 고장 거제, 태평양 정기받아 아득한 고향.”

 “아! 우리 거제야!”

 “소리 작다, 크게!”

 우린 계속 ‘아, 우리 거제야!’를 반복한다. 정작 본인은 가사가 불분명하시다.      

내가 살던 고향 거제도에는 친가도 외가도 있었다. 그래, 지금은 ‘있었다.’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행복했다 하시고, 병을 못 고치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 하셨다.     

 오늘은 ‘거제의 자랑’ 노랫말을 친필로 적어놓은 아버지의 노트를 찾아 펼쳐본다. 노트 맨 앞장에 멋진 글씨체로 정성껏 12월까지 적어놓으셨다. 이렇게 고향생각이 아버지의 노트에 까지 왔다.     

 1월부터 12월까지 가만가만 불러본다.

 ‘동짓달이로다. 동백꽃 붉게 피는 내 고향 거제, 면면촌촌 곳곳마다 풍경도 좋다.

 아, 우리 거제야!’     

고향을 떠 올리다 보니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다. 내 유년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있는 그곳. 아버지의 고향 거제도!


 “아버지, 잘 계시지요? 박현철 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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