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기간 동안 뭐 하셨나요? (1)
오후 3시.
태형은 구직을 위해 면접을 보는 중이다.
직전에 다닌 회사보단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업계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회사다.
면접관의 질문이 시작됐다.
"이전 회사 퇴직 후에 6개월간 공백이 있으신데, 이 기간 동안 저희 회사 지원하시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셨나요?"
태형은 사실 노력을 하나도 안 했다.
퇴직금으로 6개월 동안 해외여행 다니고, 그런 김에 보고 싶었던 오리지널팀의 뮤지컬도 보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핸드폰을 도둑맞아 큰일 날 뻔했고, 또 다른 여러 가지 경험을 했지만 이 회사에 지원할 노력은 조금도 안 했다. 그냥 최태형 자신의 추억과 휴식을 위해서만 6개월을 보냈다.
"6개월 동안 오대륙을 여행했습니다. 단순히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도 다녀오며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방법도 배웠고, 대형 공연을 보며 그 나라의 문화와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를 캐치하는 능력도 배웠습니다. "
그런 적 없다.
하필 그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했을 뿐이고, 오리지널팀의 공연 관람은 태형의 버킷리스트였을 뿐이다.
"오대륙을 여행할 정도면 영어를 좀 하시나 봐요? "
"원어민급은 아니지만 혼자 여행을 다닐 수준은 됩니다. "
"마지막 토익 점수가 960점이네요. 좀 더 공부해서 만점 받지 왜 960점에서 그만뒀어요? 요즘 만점자들 차고 넘치는데.. "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모를 질문이었다. 하지만 태형은 침착하게 답했다.
"토익 990점이 필요한 업무가 주어진다면 단기간 내로 990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 아니 우리 부서는 영어 쓸 일이 거의 없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태형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면접관들은 태형의 이력서와 경력기술서에 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면접 자리에 와서야 살펴보는 느낌이었다.
"어? 전에 회사에서는 TF팀 팀장까지 하셨네요? TF 업무는 마무리 잘하셨어요? "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질문이 면접 시작 30분 만에야 나왔다. 태형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네, 해당 TF팀에 대한 사항은 직전 회사 기밀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제가 이끈 프로젝트 중에 가장 큰 성과를 거뒀고, 현재는 TF팀이 아닌 정식 부서로 변경되었습니다. "
"음.. 근데 왜 퇴사했어요? 전 회사에서 대우도 좋았을 것 같은데."
태형은 여기서 확신했다. 이 회사는 아니다.
면접관 태도부터 질문 퀄리티까지 전부 촌스럽다. 여긴 합격한다고 해도 6개월 공백을 이유로 혹은 온갖 이유를 다 갖다 붙여 연봉을 동결시키고도 남을 회사이며, 연차도 한 달 전에 허락을 맡아야 하고, 명절 상여는 꿈도 못 꾸고, 회사 청소를 직원들을 시켜서 할 것이다.
무려 2025년에 임직원이 130명이나 넘는 여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쉬고 싶어서요."
태형은 그냥 면접을 포기한 티를 팍팍 내며 대답했다. 면접관들도 물론 느꼈을 것이다. 잠깐의 적막이 흐른 뒤, 세명의 면접관 중 한 명이 질문했다. 면접시간 동안 한마디도 안 했던 면접관이었다.
"쉬었더니 좋던가요? 오대륙 여행 코스 짜기도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테고, 오리지널팀 공연표 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 모든 것들이 공백을 대신할 만큼 의미가 있었나요?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여쭤보는 거예요. 직전의 노동을 끝내고 휴식하고 돌아와서 또 다른 노동을 시작한다는 게 태형 씨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하고요. "
태형이 전혀 준비하지 못했던,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질문을 하는 태도나 말투에서 이미 면접관 본인은 태형과 같은 시기를 지났던 것 같았다.
태형은 본인도 지난 6개월이 진정으로 즐거웠는지, 진짜 휴식이었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
태형은 답변을 위한 시간을 구했다. 질문한 면접관은 '네, 얼마든지요.'라는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여행이 지겨워서 6년 일한 여행사를 그만두고 선택한 휴식 방법이 왜 오대륙 여행이었으며, 새로운 여행기획 상품을 만드는 것처럼 왜 아프리카 오지까지 갔을까.
정말 휴식이 맞았을까.
그때의 최태형은 정말 자신을 위한 여행 계획을 짠 게 맞았을까. 어쩌면 새로 시작해야 할 업무를 하기 위해 휴식을 가장한 입사 준비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생각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