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독서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아무도 독서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2)

by 수수


'대한민국 성인 독서율 43% 시대, 성인 10명 중 4명만 책을 읽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

출근채비 중에 아침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걱정 어린 소식을 전한다. 민철은 성인 독서율 43%도 많다고 생각했다. 과연 직장인들 중에 책을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퇴근 후 책을 읽을 시간이 있어도 사고할 능력, 습득력 등 그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그 힘, 그 에너지가 남아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민철은 당연한 통계라고 생각하며 입을 옷을 골랐다. 장롱문을 열고나서도 옷 고르는 시간도 촉박한데 무슨 독서냐. 싶었다.


오늘도 민철은 9시 55분, 출근버튼을 눌렀다.


어제와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다. 수많은 말과 글자에 파묻히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예의 있게 거절하느라 온종일 씨름한다.


하필 오늘은 앱 업데이트 날이라서 업데이트까지 관제해야 한다. 한 달마다 돌아오는 가장 힘든 날이다.


업데이트하는 날이라고 해서 민철에게 아량을 베푸는 부서는 그 어디도 없다. 민철은 이 모든 업무들을 동시에 해내느라 두통이 온다. 그러나 두통약을 먹을 시간도 민철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보니 오후 7시가 되었다. 오늘 하루동안 이번 주 내로 체크해야 할 것이 20개 넘게 쌓였다. 민철은 내일의 자신에게 맡기기로 한다. 더 이상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글자가 지렁이 같이 보이기 시작기 때문이다.


민철은 얼른 회사를 도망쳐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보이는 표지판과 간판조차 읽기 싫다. 더 이상 무언가를 보고, 듣고 싶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소리가 싫다.


토요일이다. 민철은 토요일마다 유기견 봉사를 다닌다. 용품 정리, 견사 청소, 이불 빨래, 강아지 목욕을 시켜주다 보면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 꽤 오랫동안 해온 봉사다.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주 봉사를 다닌다. 물론 강아지들과 정이 들었기도 했지만 민철에겐 그건 부수적인 이유고, 그냥 일주일 간 터질 것 같았던 머리를 비우러 가는 일종의 루틴이 쉼이다.


큰 쓰레기봉투 열댓 개를 버리고 나면 봉사가 끝난다. 대략 오후 4시쯤이면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출발한다. 매주 봉사하고 돌아오는 길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민철은 아무래도 정신력보단 체력을 회복하는 게 더 빠른 것 같다. 지하철에 앉자마자 벌써 체력이 회복되는 걸 느낀다.


집에 도착한 민철은 여유를 느끼며 배달음식 시키고, TV로 영화를 본다. 행복한 순간은 잠시뿐이라고 했던가. 핸드폰 속 회사 메신저가 울린다.



@한민철 민철님 안녕하세요. 라이브서버 이벤트 설정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하고 싶다. 민철은 이럴 때 참 곤란하다. 다들 황금 같은 주말을 보내고 있을 텐데, 당장 대응이 가능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개발팀 전체방에서 모두를 부른다. 해당 이슈의 대응과 상대적으로 관련이 먼 개발자들도 메신저를 볼 수밖에 없다. 왜냐면 대응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면 결국 그 남은 사람이 해결해야 하니까.


@All 주말에 정말 죄송합니다. 주말 이벤트 설정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QA서버에서 확인 후 통과된 이벤트이고 라이브서버에 똑같이 적용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이슈 확인 부탁드립니다.


읽은 사람의 숫자가 순식간에 늘어난다. 곧바로 답장이 온다.


@한민철 수정했습니다. 바로 라이브서버에 적용할까요? QA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라이브서버에 오전/오후 시간을 착각해서 적용했어요. 죄송합니다.


민철은 잠시 고민에 빠진다. 오전/오후 시간을 착각해서 적용한 거라면 QA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또 달리 보자면 이 정도의 이슈는 바로 라이브서버에 적용해도 될 듯하다. 에라, 모르겠다. 주말이다, 그냥 쉬자. 큰 이벤트도 아니니까.


@이민호 민호님, 그 정도면 바로 라이브서버에 적용 부탁드립니다.
@한민철 민철님 적용했습니다. 라이브서버에서 이벤트 적용된 것 확인했습니다. 제 실수로 주말에 대응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민호 별말씀을요. 바로 대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고도화된 '회사어'로 개발팀 대화를 마무리한 민철은 곧바로 이벤트 이슈를 발견한 다른 단체방에 해당 사항을 알린다.


@주민정 민정님, 이벤트 시간 수정 되었습니다. 오전/오후 시간을 착각하여 발생한 이슈로 현재 정상 진행 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민철 민철님, 빠른 대응 감사합니다. 이벤트 정상으로 진행되는 것 확인했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메신저 밖에서는 서로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며 속으로 욕하고 있겠지만 아무튼 일은 마무리되었다. 오후 9시였다.


이벤트가 잘 적용되었어도 유저들의 반응은 계속 모니터링해야 한다. 유저들의 반응이 부정적이라면 또 다른 대안을 세워야 한다. 그땐 일이 정말 커지 때문이다.


민철은 11시 넘도록 모니터링했다. 카페 게시판이 욕으로 도배되었긴 했지만 점점 사그라드는 중이다. 이슈가 해결이 되었다는 신호다.


오늘 하루 머리를 비우고, 체력도 충전했는데 정신력은 갑작스레 방전되었다. 민철은 방으로 들어와 잘 준비를 한다. 지금 자야 그나마 온전한 정신력으로 내일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침대 옆 베드테이블에 놓여 있는 책 한 권.

민철은 '나중에,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읽자.'라는 결심과 함께 책장에 책을 꽂아둔다.


민철이 독서를 미룬다고 해서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판단력이 흐리거나 그렇다고 또 게으른 사람은 아니다. 평일에는 전문적인 업무를 하고, 주말에는 봉사와 연애도 하는 평범한, 아니 보통의 청년들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런 민철에게 '독서할 시간'은 그 누구도 주지 않는다. 한민철 자신도 그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아니, 시간을 준다 해도 지금의 민철에겐 그 독서는 쉼이 아닌 업무로 다가온다.


민철은 정신적인 여유를 꿈꾼다. 그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다. 먹고살만해지면, 업무 시간이 짧아지면,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될 때, 그때 마침내 미뤄둔 독서를 하겠노라. 서점에 들러 고심해서 책을 고르고 구매한 그 시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독서를 할 것이다.


책은 좁은 책장 안 다른 책들 사이에서 민철의 손 끝에 선택될 그날을 기다리며, 시간의 바다에 잠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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