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독서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아무도 독서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1)

by 수수

아침 7시. 핸드폰 알람이 거세게 울린다.


민철은 아, 연차 낼까. 몸이 너무 무거운데.라는 생각을 백번도 더 한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겨우 잠자리에서 벗어나 출근채비를 한다. 5년이나 됐지만 아침 알람은 항상 낯설다.


민철이 사는 곳은 강동, 회사는 구로디지털단지다.

늦어도 8시엔 지하철을 타야 한다. 민철의 회사는 아침 10시부터 업무 시작, 오후 7시 퇴근인 곳이다. 대부분의 회사보다 업무를 늦게 시작한다고 해서 딱히 장점은 느끼지 못했다. 집이 가까우면 좀 더 잘 수야 있겠지만.


1시간 45분 동안의 출근길동안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려서 약 10여분을 걸어가야 회사 정문에 발을 붙일 수 있다.


9시 55분. 출근버튼을 눌렀다. 오늘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부디 메신저에서 내 이름이 나오지 않기를. 제발.


@한민철 님, 안녕하세요. 어젯밤 메일로 보내드린 제안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간절한 기도는 씨알도 안 먹혔다. 회사 메신저가 민철을 부른다.


그냥 메일로 보냈다고 하면 되지 굳이 '어젯밤'이란 말까지 붙여 밤까지 일했다고 생색내는 이 사람.

일부러 제일 큰 단체 메신저방에서 말하는 이 사람. 하여튼 간 맘에 안 든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 욕심이 많아서 일은 벌여놓고 수습을 못하는 타입이다. 그냥 일 못 하는 사람이란 얘기다. 아주 골치가 아프다. 하필 민철과 업무가 겹치는 사람이라 지난 5년 동안 민철의 스트레스 원흉이었다.


안녕하세요. 준성 님. 넵, 확인해 보고 오전까지 회신드리겠습니다.


메일함을 여는 동안 민철은 생각했다. 어차피 또 구현 못할 거 갖고 왔겠지.


제안서를 확인했다. 민철의 예상이 맞았다. 현재 우리 팀에서 구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류의 비즈니스 모델은 구현이 어렵다고 지난 5년 동안 얘기 했는데도 '이런 류'가 정확하게 뭔지 모르나 보다. 제안서 쓰기 전에 물어라도 보던가.


왜 안되는지까지 개발팀이 직접 설명을 해준 적도 있었다. 예시까지 들어주며 비개발자인 박준성에게 아주 쉽게 설명했었다. 그땐 분명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하더니 똑같은걸 또 갖고 왔네.


한숨부터 나온다.


박준성과 같은 단체방에 있던 다른 개발자들에게 제안서를 공유했다. 물론, 우리 개발팀만 있 단체방에.


@김민희 민희 님, 안녕하세요. 사업부에서 던진 건데 이거 저희 구현 못하죠? 전에 갖고 왔던 거랑 똑같은 거 같은데
[250112_박준성_신규BM제안서_v1.xlsx]
@한민철 민철 님 안녕하세요. 네, 구현 못해요. 이거 하려면 장기적으로 하나씩 뜯어가며 구현해야 해요. 그 사이에 잘 돌아가던 것도 괜히 터질 수 있고요. 그리고 매출이 나올만한 아이디어도 아닌 거 같은데 이게 어떻게 매번 사업부에서 통과되는지 의문이네요


민철은 개발팀의 판단을 그대로 메일로 회신했다.


박준성 님, 안녕하세요.
개발팀 한민철입니다.

보내주신 제안서를 내부에서 꼼꼼하게 검토한 결과 구현이 불가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유는 지난번 저희 개발팀과 '왜 구현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미팅 때 설명드린 바와 같습니다.

송구하오나 향후 새로운 BM 제안 주실 때, 박준성 님의 이번 제안서처럼 기존 코드를 수정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최대한 지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발팀 한민철 드림


사실 박준성이 제안한 비즈니스 모델은 구현이 되긴 된다. 다만, 시간과 공수가 상당히 들어가는 일이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이슈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아이디어라 필사적으로 개발팀은 거절 중이다. 이것만을 위해 팀을 새로 꾸릴 수도 없고, 아무튼 여러 가지로 복잡하니깐 거절하는 것이다. '구현하려거든 나 퇴사하고 나서 하라'는 생각으로 개발팀이 절대 수용하지 않는 제안 중에 하나다. 사실 이런 게 세네 개쯤은 더 있다.


민철의 직무는 회사에 있는 9시간 동안 다른 팀 혹은 계열사, 협력업체에서 오는 제안, 검토요청, 질문, 기타 문의 등을 팀 대표로 대응하는 것이다. 개발팀의 업무가 더 이상 가중되지 않도록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이다. 때문에 민철은 업무 시간 동안 매우 많은 양의 글자를 읽고, 쓴다. 메신저나 메일뿐만 아니라 대면회의 땐 회의록 작성은 물론이고 어젠다 관련한 의견도 내야 해서 말하고, 듣고, 쓰고, 읽기를 하루에 9시간을 한다.


글자와 말에 파묻혀 산다는 말이 딱이다.


민철은 과학적인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하루에 수용할 수 있는 '말'과 '글'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확신했다. 기가 막히게 퇴근시간만 가까워지면 집중력과 판단력이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오후 7시.

퇴근길에 오른 민철은 핸드폰도 보지 않는다. 핸드폰도 글자 투성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아티클조차 읽고 사고할 힘이 없다. 다들 어떻게 에너지가 남아서 핸드폰을 보는 건지 궁금할 뿐이다. 같은 이유로 음악도 듣지 않는다. 그냥 조용하게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9시다. 씻고 저녁만 먹어도 잘 시간이다. 이직을 하든, 이사를 가든 둘 중에 하나는 꼭 올해 안에 해내리라 마음을 먹지만, 그게 또 벌써 5년째다. 현실적인 문제로 이사가 이직보다 어렵고, 이직은 시간이 없어 포트폴리오에 'ㅍ'도 시작을 못했다.


오늘도 민철은 겨우 샤워만 하고 나와 저녁은 굶는다. 너무 배고프지만 밥 먹을 힘이 없어 그냥 굶기로 했다. 민철은 아무 생각도 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본다. 이게 민철의 쉬는 방법이다.



몇 분 정도 쉬었을까. 슬슬 잠이 온다.

반쯤 감긴 민철의 눈, 그 시선 끝에 랫동안 읽지 않아 지 쌓인 스테디셀러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저거 읽어야 하는데...' 생각을 마지막으로 민철은 그대로 잠들었다. 밤 11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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