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기간 동안 뭐 하셨나요? (2)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고작 몇 초에서 몇 분이 흘렀겠지만 그 대답을 생각하는 잠깐동안 태형의 시간은 지난 36년간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숨을 한번 고른 후 태형은 입을 열었다.
"우선 멋진 질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질문 주셨다고 하시니, 저도 인간 대 인간으로 답변하겠습니다. '여행'이 좋아서 6년 동안 고객들의 여행을 위해 살았어요. 중간중간 휴가로 여행을 가긴 했어도 온전한 나의 휴가가 아닌 '이거 여행 상품으로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꽉 찬 휴가였었어요. 사실 이번 오대륙 여행도 그 연장선이었다는 걸 면접관님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제 자신에겐 쉬었다고 속일 수 있고, 면접에서는 당당하게 여행 관련 자기 계발을 했다고 할 수 있으니 선택했던 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말 솔직하게 털어놓은 태형은 면접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마음 한편에 언젠간 꼭 해방되고 싶었던 아주 무거운 감정이 있었는데, 그게 답변을 마침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져서 마음의 무게가 굉장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태형의 답변을 듣고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면접관에게 태형은 한마디 더 덧붙여도 되냐고 물었다.
면접관은 "네. 얼마든지요."라는 짧은 답변으로 태형에게 면접의 남은 시간을 허락했다.
"그리고 다시 고객들의 여행을 위해 노동을 시작하게 된다는 건, 제게 운명 같은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여행이 지겨워서, 쉬고 싶어서 이전 직장을 그만둔 게 맞지만 말씀 주셨던바와 같이 그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그만둔 것엔 후회가 없습니다. 전 회사를 사랑한 게 아니라 여행을 사랑했던 거였으니까요. 좋아하는 것도 질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고, 똑같이 이 자리에서 똑같이 이 말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제 노동의 의미이자, 정말 솔직한 답변입니다. "
태형의 답변을 들은 세 명의 면접관은 동시에 면접 평가서에 무엇인가를 적기 바빴다.
태형은 그게 어떤 평가 내용이든 상관이 없었다. 정말 후련했고, 누군가에게 내가 얼마나 내 일을 사랑하는지 알려줄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하필 지금이 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역시 후회 없었다.
일주일 후, 태형에게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귀하께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채용에서 합격 소식을 전달드리지 못해 매우 아쉽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졌다. 태형은 본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회사였지만 괜스레 씁쓸했다.
태형은 내일 다른 여행사의 면접을 본다. 이젠 당당하게 왜 오대륙 여행을 했는지와 함께 왜 또 여행사를 지원하게 되었는지를 진심 어리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달았다.
태형은 회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직무를 사랑했으며 그 직무를 태형에게 맡긴 회사에 다닌 것뿐이라 점.
그 구분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내일 면접의 예상 질문 리스트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