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보는 방식의 전환
폴 세잔은 흔히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의 예술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세잔의 진정한 중요성은 새로운 화풍을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회화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회화의 중심에 놓았다. 다시 말해 세잔은 대상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보는 행위 자체’를 사유한 화가였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미술계에서 인상파는 혁명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사물의 고정된 형태보다 빛의 변화, 순간의 인상, 감각의 떨림을 포착하려 했다. 이는 회화를 학구적인 규범에서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안을 낳았다. 모든 것이 찰나의 감각으로 흩어진다면, 회화는 무엇으로 남을 수 있는가. 세잔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곡가 라벨과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는 인상파의 색채 실험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순간으로 소멸되는 것을 경계했다.
세잔의 목표는 명확했다.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구조를 회복하는 것, 즉 순간과 지속을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자연을 원통, 구, 원뿔로 다루라”는 선언은 이러한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자연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환원하라는 수학적 지침이 아니다. 세잔이 말한 구조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볼 때 느끼는 무게, 부피, 긴장, 그리고 사물들 사이의 관계였다. 예를 들면, 세잔의 정물화에서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얹힌 색의 덩어리이자, 공간을 밀어내는 질량이라 본. 테이블은 종종 기울어져 있고, 원근법은 일관되지 않다. 이는 구도적 결함이 아니라 의도된 선택이다. 우리는 실제로 세계를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보지 않는다. 시선은 이동하고, 인식은 겹쳐지며, 대상은 기억과 현재의 지각이 혼합된 상태로 경험된다. 윤곽선은 점점 사라지고, 색면들이 겹겹이 쌓이며 형태를 만들어낸다. 색은 더 이상 대상의 장식이 아니라, 형태를 구축하는 힘이 된다. 붓질 하나하나는 감각의 흔적이다. 그래서 세잔의 그림은 안정적이기보다는 긴장감이 드러낸 형태로 완결되지 않고, 화면은 늘 생성 중인 상태로 남아 있다. 세잔의 화면은 바로 그 불완전한 인식과 감각의 총합을 담고 있다.
세잔이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그린 생트빅투아르 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산의 풍경을 기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같은 대상을 통해, 자신의 시선과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탐구했다. 반복은 복제가 아니라 사유의 방법이었다. 산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구조였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세잔을 ‘지각의 화가’라 불렀다. 그는 세잔의 회화를 통해 인간의 지각이 본질적으로 미완성이며, 세계는 언제나 완성되기 이전의 상태로 경험된다고 보았다. 세잔은 그 미완성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회화가 완성된 세계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각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잔의 실험은 이후 미술사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는 세잔의 구조적 사고를 급진적으로 확장했고, 추상미술은 대상보다 관계와 형식 자체를 사유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 모든 흐름의 출발점에는 세잔이 던진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세잔의 회화는 화려하지 않으며, 때로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는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 세계는 이미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주어지지 않으며,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더듬거리는 과정 속에 있다. 세잔은 그 불완전함을 미학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화가였다. 그렇기에 그는 과거의 화가가 아니라,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던진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을 즉시 판단하지 않아도 되며, 빠름보다는 천천히 깊이 보며, 답은 하나가 아니며, 불완점함을 숨기지 않고 견디는 능력에 대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