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후회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가 무엇일까? 성악을 전공하며 여러 언어를 경험하다보면 사실 쉬운 언어는 없다. 심지어 한국어도 노래하기엔 그다지 편한 언어는 아니다. 외국어를 해보면 그 나라 뉘앙스를 살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중 러시아어는 단연 최고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전혀 눈과 입에 붙지 않는 러시아어를 경험하며 도데체 어떻게 해야하나 하며 한국어로 발음을 써가며 무작정 외웠던 시간이 생각난다. 차갑고 웅장하며 때로는 따스한 음악이 러사아의 설원과 침엽수 그리고 신비로움에 매혹되지만, 언어로 들어가면 소름이 돋는다. 이 같은 이유로 해외에서도 러시아 원어로 러시아 오페라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자국 언어로 번역하여 공연을 하지만, 음악으로만 러시아의 느낌을 느낄 뿐 뭔가 허전한 면은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도 러시아 음악과 오페라에 대한 로망과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늘 남아있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을 기초하여 차이콥스키 본인과 코스탄틴 실로프스키가 함께 대본을 완성한다. 다른 작품의 대본과는 다르게 푸시킨 원작에 매우 가깝게 완성하며 그의 서정적인 음악에 푸시킨의 시가 더해져 더욱 풍부해진다. 민속적 선율은 러시아 특유의 정서와 풍경을 묘사하며 인물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선택, 그리고 시간 속 후회의 문제를 탐구하는 서정적 심리극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상류 사회를 배경으로 개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제약 사이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네긴과 타티아나, 그리고 렌스키의 이야기는 사랑과 질투, 우정과 배신, 그리고 선택과 그 결과가 인간 삶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지 성찰하게 한다.
타티아나는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을 지닌 인물로, 오네긴에게 쓴 첫사랑의 편지는 단순한 로맨틱한 고백을 넘어 개인적 진실성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긴장을 기록한 문서라 할 수 있다. 그녀의 편지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외부 세계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상징하며, 당시 귀족 사회에서 요구되는 관습과 금기에 맞서는 용기이기도 하다. 반면 오네긴의 거절은 냉소적 태도를 넘어, 인간이 사회적 위치와 자기 중심적 사고 속에서 감정을 어떻게 억제하고 선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결과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삶의 깊은 허무와 후회를 불러온다.
결투 장면은 선택과 그 책임의 무게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오네긴이 질투와 냉소로 친구 렌스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순간,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삶의 예측 불가능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후 오네긴은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만, 마음속 깊은 공허와 늦은 후회를 피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징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후회는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차이콥스키는 음악을 통해 이러한 심리적 내면을 극대화한다. 타티아나의 편지 아리아는 그녀의 내적 갈등과 순수한 감정을 선율로 구현하며, 오네긴의 후회 장면은 음악적 긴장과 정서를 통해 인간 심리의 복잡함과 허무를 전달한다. 시각적 장치 없이도 음악만으로 인물의 내면과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예브게니 오네긴》은 사랑과 상실, 사회적 제약과 개인적 자유, 선택과 후회라는 인간 조건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다.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이야기는 특정 시대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와 감정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다. 선택의 순간과 그로 인한 후회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경험이며, 이 오페라는 관객에게 인간 삶의 허무와 아름다움, 그리고 내적 성찰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선택과 후회는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