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 22

by Polymath Ryan

일년에 두 번, 늘 스케줄을 비울 때가 있다.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의 수련회 기간은 나의 시간과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다. 어떤 스케줄도 그때는 잠시 내려놓는다. 진행 중인 리허설이나 중요한 미팅도 모두 스톱이다.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모두.


수련회를 가면 정말 피곤하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맡은 일을 하려면 계속 뛰어다녀야 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문제가 있는 부분은 빠르게 해결하며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게 정리해야한다. 원래 밖에서 잠을 잘 못자는데, 유독 그곳만 가면 꿀잠을 잔다. 하지만 그곳은 쉼이다. 혹은 도피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쉼'은 일의 반대말이 아닐까?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생각해본다. 지금의 쉼은 계획하고, 측정하고, 목족에 종속되는 듯하다. "충분히 쉬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회복되었는가"로 말한다. 쉼은 성과를 위한 과정이 된다. 쉴 때도 다음 작업을 위해 설계를 하고 잠은 다음 작업을 위한 배터리 충전 쯤으로 생각한다. 즉 정비의 시간이다.


과거는 어땠을까?

피타고라스는 낮과 밤, 계절의 순환, 축제와 제사는 노동과 휴식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리듬이 인간의 삶에 스며들었다는 의미를 가졌다. 쉰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노동에서 우주적 조율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의미를 가졌다. 삶은 우주의 자연의 질서에 다시 맞춘다는 말이다. 중세에는 휴일은 선언이었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창조주가 6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마지막 하루 쉬었다는 말은 창조주가 쉼을 창조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너무 피곤해서 쉬었다는 말은 어색하다. 인간을 위해 쉼을 창조한 것이다. 쉼은 노동을 중단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계의 자각이다. 인간은 쉼을 갖지 않으면 않되는 전능하지 않은 존재다.


이때까지만 해도, 쉼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집단의 리듬이었다. 모두가 함께 멈추기 때문에 불안이 덜했다. 쉼은 비교되지 않았으며 성과로 환산되지 않았다. 과거의 쉼은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쉼은 인간이 시간과 우주, 신과 자연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쉼은 선택이 아니라 과제가 되었다. 자기 계발서들은 "잘 쉬어야 한다"는 명령으로 요가, 명상, 여행, 디지털 디톡스 등 또다른 목표와 성취를 요구한다. 결국 쉴 때, 또 무언가 해내야 한다. 피곤하다.

결국은 쉬기 위해 공간을 소비하고 구매하며 시간을 예약하고 경험은 콘텐츠로 올려야 하는 다시 반복되는 시장의 상품이 된다.

지금의 쉼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잠시 속도 조절을 할 뿐이다.


365일 중, 몇 일을 빼서 수련원에 들어가는 시간은 또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곳은 침묵으로 시작한다.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침묵한다. 그리고 세상을 잠시 잊어버린다. 오로지 하나님과 본인의 시간을 찾는 시간이다.

결국 우주적 시간으로 나 자신을 내려놓은 시간이다. 핸드폰과 노트북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세계가 나를 잠시 잊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시간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굳이 더 나아지지 않아되 되는 사실과 그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지금의 쉼이 다음을 위한 충전이라면, 필자가 잠시 머무는 이곳에서의 쉼은 그저 나의 존재를 보는 시간이다.

토요일까지 글을 못쓴다는 말을 참 거창하게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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