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고 있는가?
어느 날, 필자의 딸이 영화 추천을 받았다며 '나이트메어 앨리'를 함께 보자고 한다.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공포영화인가 했지만, 유령이나 좀비가 나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영화였다.
2021년 개봉한 이 영화는 심리 스릴러 장르로 윌리엄 린지 그레샴의 소설을 원작으로 1947년 한 차례 영화로 제작된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다시 영화로 세상에 내놓는다. 개봉 당시 충격적인 엔딩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지만 1차 시장에서는 그다지 흥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2차 시장(OTT)에서 성적을 내며 입소문으로 흥행을 하고 있다.
배경은 1940년대 미국이다. 흔히 전쟁을 통해 강대국이 된 나라로 기억되지만, 사실 불안과 균열의 시대였다. 대공황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개인의 삶과 도덕관을 흔들었다. 이때 미국은 그 동안의 전통적 가치였던 신, 도덕, 공동체 등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계 평화의 이름으로 국가적 정의 실현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개인에게는 죽음, 상실,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러면서 서커스라는 오락 공간이 생긴다. 이것은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합소이자, 인간의 욕망과 공포를 안전하게 소비하는 공간이었다. 장애인, 실패자 등 낙오자들이 모여 떠돌아 다니며 미국의 그늘이 된다. 대답없는 신보다 대답해주는 인간을 더 믿기 시작하고, 죽음, 상실,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견딜 수 없어 속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위로라는 이름으로 속임수가 종교가 되는 시대였다. 그저 위안을 받고 싶은 인간을 위한 산업이자, 문화적 장치였다.
이 영화가 주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을 믿고 싶어하는가'의 질문이다. 주인공 스탠튼은 사람 읽는 법을 배운다. 처음에는 생존의 기술이었지만, 점점 지배의 기술로 바뀐다. 그 기술은 욕망으로 나타나고, 그 욕망은 방향을 잃은 채 거대해진다. 슬픔에 잠긴 부유층,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에게 진실이 아니라 위안을 원한다. 스탠튼은 그 욕망을 정확히 간파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준다.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라,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는 위대한 역할이라 자신을 최면한다. 그리고 위안을 얻은 사람들은 더 큰 욕망을 원한다.
그는 타인의 무의식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만, 자신의 무의식은 철저히 가둔다. 남에게 그의 과거를 말하지 않지만, 그의 침묵이 그의 행동에서 욕망을 일으킨다. 즉 가둔 기억은 행동으로 반복되며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성공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연기가 진짜라고 느낀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자아(Ego)의 붕괴 순간이다. 더 이상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쾌락과 권력에 잠식된다. 스탠튼은 타인을 속이는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인물인 것이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은 기존의 가치를 해체한 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로 말한다. 하지만 스탠튼은 기존 가치를 파괴하지 못한 채, 그의 욕망을 따랐을 뿐이다. 그는 초인이 되려 했지만 결국 신을 흉내 낸 인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돌고 돌아 서커스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있는 닭은 씹어 먹는 괴물의 자리로 돌아오는 장면은 벌을 받는 장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는 계시다. 타인을 조롱하며 내려다보던 자리에 스스로 서게 되면서 그 운명으로 되돌아오는 계시다.
이 영화는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것은 거짓이 아니라, 거짓임을 알면서 거짓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다루는 인간이다. 그리고 다시 그 밑바닥으로 돌아가는 결과이다.
지금 당신은 어떤 가치를 믿고 따르고 있는가? 그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그것을 믿고 싶은 욕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