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에곤 실레는 짧은 생을 살다간 불행한 예술가로 알고있다. 아버지의 정신병과 어머니와의 불화는 그의 짧은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어린시절 그림에 큰 관심을 보였던 그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우며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게 되며 영향을 받았고, 곧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제1차 세계대전 징집 후, 많은 변화를 보인다. 복무 중에도 전시를 하기도 하고, 포로 수용소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럽을 덮쳤을 때, 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가 사망한 지 사흘 수 그도 28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관람된다기보다 마주침에 가깝다. 우리는 그의 그림 앞에서 무언가를 ‘본다’기보다는, 무언가로부터 들춰진다. 실레의 인물들은 부끄러움 없이 벗고 있지만, 정작 불편해지는 쪽은 관람자다. 이 불편함은 외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미화의 장막이 제거될 때 발생하는, 존재 노출의 감각이다.
서구 미술사는 오랫동안 신체를 이상화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비례, 르네상스의 균형, 신고전주의의 절제는 모두 ‘몸을 통해 질서를 말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실레는 이 전통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의 몸은 질서를 담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서가 붕괴된 이후의 잔해에 가깝다. 비틀린 팔다리와 꺾인 목, 과장된 손은 기술적 미숙이 아니라, 세계 인식의 결과다. 실레에게 인간은 더 이상 조화로운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이미 중심을 상실한 존재다.
이러한 신체 인식은 20세기 초 빈이라는 공간과 깊이 맞물려 있다. 제국은 몰락하고 있었고, 도덕은 불안정했으며, 학문은 인간 내부로 파고들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했고, 쇤베르크는 조성을 해체했으며, 말러는 교향곡에 불안을 심었다. 실레는 이 흐름 속에서 몸을 가장 급진적인 텍스트로 선택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그려냈다.
실레의 누드는 종종 오해된다. 그의 인물들은 성적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그 노출은 관능을 향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람자를 유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관람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실레의 인물들이 취하는 자세는 안정되지 않았고, 시선은 종종 정면을 찌른다. 이때 발생하는 긴장은 단순한 외설 논쟁을 넘어선다. 그것은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왜 이 몸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몸을 볼 권리가 있는가?
1912년 실레가 외설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문제는 그림 그 자체보다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인간상에 있었다. 실레의 그림은 금기를 넘었기 때문에 위험했던 것이 아니라, 금기가 왜 존재하는지를 묻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다. 그의 누드는 쾌락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욕망의 불안, 성의 폭력성, 신체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이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도덕의 이면을 드러내는 윤리적 행위에 가깝다.
실레의 자화상은 이 질문을 더욱 밀도 있게 만든다. 그는 자신을 응시의 주체이자 대상,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동시에 배치한다. 마르고 각진 몸, 불안정한 자세, 일그러진 얼굴. 이 자화상들에는 자기 미화의 흔적이 없다. 대신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불안 요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실레는 스스로를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노출한다. 이때 자아는 정신적 정체성이 아니라, 상처 입고 욕망하는 몸으로 정의된다.
그의 작품 〈죽음과 소녀〉에서 우리는 실레 사유의 핵심을 본다. 사랑은 죽음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죽음을 끌어안는다. 소녀는 죽음을 밀어내지 않고, 죽음은 소녀를 폭력적으로 끌어가지 않는다. 이 기묘한 포옹은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삶을 확인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를 더 선명하게 인식한다. 실레에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다.
이 지점에서 실레는 후기 실존주의를 예감하게 한다. 인간은 불안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몸은 그 불안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장소다. 실레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외면해온 질문을 그대로 남겨둔다. 그의 예술은 치유가 아니라, 직면의 미학이다.
오늘날 실레가 다시 소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몸을 통제하고, 규정하고, 검열한다. 동시에 우리는 몸을 통해 정체성을 말하고, 저항하고, 드러낸다. 실레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이 긴장을 그려냈다. 그의 그림은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다.
에곤 실레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외면할 것인가, 혹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견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