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 23

의심과 호기심

by Polymath Ryan


의심과 호기심은 종종 서로 다른 성질의 것으로 이해된다.

호기심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태도이며, 의심은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라는 식이다. 우리는 아이의 호기심은 장려하면서도, 누군가의 의심에는 불편함을 느낀다. 의심은 신뢰를 해치는 태도, 관계를 망가뜨리는 언어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의심과 호기심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 서로 다른 국면에서 취하는 두 가지 태도에 가깝다.

호기심은 세계를 향해 열리는 첫 움직임이다. “왜 그럴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세계가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호기심은 대상에 대한 호의이며, 이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때 세계는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더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은 그 자체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질문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필연적으로 묻게 된다.

“정말 그럴까?” ,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


이 지점에서 호기심은 의심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이 의심은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에 도달하기 전까지 판단을 유예하겠다는 태도다. 의심은 세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섣불리 닫히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다.

라틴어 dubium 이 말하듯, 의심은 두 갈래 사이에 머무는 상태다. 결론을 보류하는 능력, 질문을 질문으로 남겨두는 인내. 그래서 의심은 호기심이 깊어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다.


철학은 언제나 이 연속선 위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놀라움’은 세계가 당연하지 않다는 감각이었고, 소크라테스의 “나는 모른다”는 선언은 그 놀라움을 끝까지 밀어붙인 의심이었다. 그는 답을 주기보다 확신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사유가 태어났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그것은 파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초를 위해서였다. 의심은 신뢰의 반대말이 아니라, 성급한 신뢰를 거부하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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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지금, 이 둘의 연결이 다시 필요할까.

우리는 너무 빠른 시대에 살고 있다.

질문은 검색으로 대체되고, 사유는 즉답으로 축소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호기심을 대신 선택하고, 의심은 충분히 머무르기 전에 곧바로 비판이나 음모론, 냉소로 변질된다.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은 더 깊이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부정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을 부정하기 전에 세상의 다양성과 세상이 내 생각대로 당연하다는 생각을 의심해야 한다.


이 시대의 문제는 질문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사실 질문 할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질문은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머무름이다. 즉답을 내기 전에 가지는 짧은 그 시간을 잃어버렸다. 맞다 틀리다의 빠른 판단이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듯이 보여진다.


지금은 오히려 질문은 넘쳐난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의심과 호기심 사이를 오가지 못한 채 곧바로 결론으로 뛰어넘는다. 그 결과 우리는 호기심 없는 의심과, 의심 없는 호기심이라는 두 가지 빈곤한 태도만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니 점 의심 없는 호기심은 얕아지고, 호기심 없는 의심은 거칠어진다.


사유는 이 둘이 왕복할 때만 살아 움직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의심도, 호기심도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이 둘을 연결하는 느린 질문의 시간이다. 확신을 늦추는 용기, 결론 없이 머무를 수 있는 태도, 이해가 도착하기 전의 불안정함을 견디는 능력이 필요하다.



의심과 호기심이 선순환이 되면 질문은 오히려 살아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살아 있는 한, 사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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