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표현의 상실
소크라테스는 글쓰기를 경계했다. 그는 문자로 기록된 지식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보았다. 책은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말을 건넨다. 진정한 지식은 대화를 통해서만 살아 숨쉰다고 그는 믿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이 생각을 그의 제자 플라톤이 문자로 기록했기 때문에 알고 있다. 말을 불신했던 철학자의 말이 글로 살아남은 것이다. 언어는 언제나 이런 역설 속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역설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책을 폭발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느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내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화 자리에서 나는 점점 더 많이 말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다. 내가 읽은 것들이 마치 무기처럼 느껴졌고, 그 무기를 쓰는 것이 지식을 나누는 일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가족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설득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멈추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 단어가 떠올랐다. 소란스러움.
그 깨달음은 오래 남았다. 나는 그 장면을 계속 생각했다. 왜 그렇게 말이 많아졌는가. 책을 많이 읽으면 더 깊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시끄러워졌다. 지식이 쌓일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흉내였다. 진짜 이해는 말을 줄이는 것인데, 나는 말을 늘리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였다. 처음에는 그저 생각을 정리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말로는 확신했던 것들이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무너졌다. 글은 거짓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화에서는 모호하게 넘어갈 수 있는 생각도, 문장으로 만들면 그 허술함이 드러난다. 나는 내가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처음으로 정확하게 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움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책과 글을 동시에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듣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내고, 수백 개의 게시물을 스크롤하며, 수천 개의 단어를 소비한다. 그러나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려다 이모티콘 하나로 대신하고, 길게 써야 할 편지 대신 짧은 메시지를 보낸다. 언어의 양은 폭발했지만 언어의 밀도는 희박해졌다. 우리는 더 많이 말하면서 더 적게 표현하고 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많을수록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언어가 빈곤해질수록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도 좁아진다. 슬프다는 감정을 열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과 그냥 "힘들어"라고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한다.
지금 나는 예전보다 질문을 많이 한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답을 내리는 것보다 질문을 여는 것이 더 정직한 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던 자리에서 이제는 상대방을 보고 듣는다. 이것이 책이 가르쳐준 답이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예상한 방향이 달랐다. 문자가 대화를 죽인 것이 아니라, 짧 말의 과잉이 깊은 대화를 밀어냈다. 우리는 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크다. 말은 소음이 될 수 있지만, 말하는 능력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