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중심에 있던 사람

인상주의 심장, 카미유 피사로

by Polymath Ryan


인상파를 떠올릴 때 우리는 모네를 생각한다. 수련 연작, 빛의 화가, 지베르니의 정원. 혹은 르누아르의 화사한 인물화, 드가의 발레리나를 떠올린다.


카미유 피사로의 이름은 그 다음쯤 나오거나, 어떤 경우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열린 여덟 번의 인상파 전시회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한 화가는 피사로 단 한 명이다. 모네도, 르누아르도, 드가도 어느 해엔가 빠졌다. 피사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인상파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심장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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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에서 시작한 화가

피사로는 1830년, 카리브해의 작은 섬 세인트토마스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령 식민지에 정착한 유대계 크레올 가정이었다. 파리 미술계는 출신과 혈통으로 줄을 세우는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피사로는 처음부터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유대인이었고, 식민지 출신이었고, 뒤늦게 파리에 온 늦깎이였다.


하지만 그는 그 이방인의 시선을 무기로 삼았다. 파리 화단의 권위 있는 살롱에 집착하는 대신, 자신이 보이는 것을 그렸다. 농촌의 들판, 시장에서 일하는 여인들, 진흙을 밟고 걷는 농부들. 당시 미술계가 원하는 신화 속 여신도, 역사적 영웅도 아니었다. 그림 안에는 언제나 땅을 딛고 서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취향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피사로는 아나키스트였다. 국가 권력을 불신했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믿었다. 그 믿음이 캔버스 위에 그대로 번졌다.


세잔과 고갱을 가르친 스승

피사로가 특별한 이유는 그림만이 아니다. 그는 놀라운 교사였다. 젊은 폴 세잔이 파리에서 방황하던 시절, 피사로는 그를 퐁투아즈 시골로 데려가 나란히 그림을 그렸다. 세잔은 훗날 자신의 작품에 '피사로의 제자'라고 직접 서명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이 스스로를 피사로의 제자라 불렀다는 사실은, 피사로의 영향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말해준다.


고갱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고갱은 피사로 곁에서 그림을 배웠고, 피사로의 집에 드나들며 인상파의 세계에 눈을 떴다. 피사로는 자신보다 훨씬 유명해진 두 제자를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빛나는 것보다 주변을 빛나게 하는 것. 인상파라는 운동이 8번의 전시회를 버텨낸 것도, 분열하기 쉬운 예술가들의 집단이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피사로라는 사람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의 파리

피사로는 말년에 심각한 눈병을 얻었다. 바람과 먼지에 민감해진 눈으로는 더 이상 야외에서 작업할 수 없었다. 평생 들판과 농촌을 그려온 화가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상실이었다. 그런데 피사로는 그 상실을 다른 방식으로 돌파했다. 파리의 호텔과 아파트 창문 안쪽에 자리를 잡고, 창문 너머로 도시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파리 대로 시리즈다. 몽마르트르 대로, 오페라 거리, 생 라자르 역 앞 광장. 높은 창문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거리는 개별 인물이 지워진 채 흐름과 빛과 움직임으로만 가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나빠진 후에 그린 이 작품들이 지금 피사로의 가장 유명한 그림들이다. 장애가 새로운 시선을 만들었다.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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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중심에 있다는 것

피사로는 1903년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3세. 그의 부고는 당시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모네는 86세까지 살며 전설이 됐고, 드가와 르누아르도 오래 살며 명성을 쌓았다. 피사로는 그들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더 빨리 대중의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하지만 미술사를 들여다볼수록 피사로의 자리는 커진다. 그가 없었다면 세잔의 기하학적 구조는 다른 방향으로 자랐을 것이고, 고갱의 원시주의도 다른 출발점을 가졌을 것이다. 인상파라는 운동 자체가 그의 끈기와 포용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피사로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는 그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중심이 있다. 빛나면서 중심인 사람과, 조용히 중심인 사람. 피사로는 후자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쪽이 더 단단한 중심이다. 빛이 사라져도 중력은 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