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영아 사건
우리는 이것을 괴물의 짓이라 부른다. 지난해 10월, 전남 여수에서 생후 133일 된 아기가 세상을 떠났다. 친모는 아이를 던지고, 밟고, 욕조에 방치했다. 아이의 몸에는 23곳의 골절이 있었다. 우리는 그 영상을 보며 분노했고, 혐오했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부모를 '괴물'이라 불렀다.
그 분노는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괴물'이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멈추고 싶다. 괴물이란 무엇인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존재? 인간이 아닌 것? 우리가 누군가를 괴물이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를 인간의 범주 바깥으로 추방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안전한 자리에 놓는다. '나는 저런 존재가 아니다'라고.
그런데 그 편안함이 과연 정직한가.
악의 평범성
1961년,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관여한 인물인 아렌트는 법정에서 괴물을 만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녀가 본 것은 평범한 관료였다. 지시를 따르고, 서류를 처리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중간 관리자였다.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악은 특별한 괴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인간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게된다.
여수 사건의 부모도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다고 한다. 이웃들은 몰랐다. 그들은 SNS에 일상을 올렸고, 웨딩 사진을 남겼다. 학대는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났다. 악은 낯선 얼굴을 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더 무섭다. 괴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때로는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죄책감과 후회는 다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부부는 거의 매일 반성문을 제출하며 시민들은 공분했다. 감형을 노린 계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진짜 죄책감일까?
죄책감과 후회는 다르다. 후회는 결과에 대한 반응이다. 일이 잘못됐을 때, 혹은 그것이 발각됐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후회는 '그러지 말걸'이라는 생각이고 반면 죄책감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능력에서 온다. 내가 한 행위가 다른 존재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를 내면에서 진짜로 감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매일 제출된 반성문이 어느 쪽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4개월 동안 아이의 울음 앞에서 폭력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 법정 앞에서 갑자기 진짜 죄책감을 느끼게 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죄책감은 훈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은 어릴 때부터 길러진다. 그 능력이 자라지 못했거나, 어느 순간 소멸했을 때, 인간은 다른 존재의 고통을 고통으로 읽지 못하게 된다.
공감이 사라진 자리
악의 근원을 단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것이 있다. 공감 능력의 부재, 혹은 소멸이다. 공감은 타인을 나와 같은 감각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아이의 울음이 배고픔의 신호로, 두려움의 표현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언어로 들릴 때 인간은 멈춘다. 하지만 그 울음이 소음으로만 들릴 때,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 그 얼굴이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느끼는 것 — 그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얼굴을 보지 않을 때, 혹은 보아도 느끼지 못할 때, 윤리는 작동을 멈춘다. 하지만 133일 된 아기는 그 말조차 할 수 없다. 울음과 눈빛이 전부다. 인간이 가장 쉽게 보호해야 할 존재, 가장 단순하게 고통을 표현하는 존재 앞에서 멈추지 못했다는 것 — 그것이 이 사건의 가장 깊은 공포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에게도 공감이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우리가 괴물이라 부를 때
우리가 이 사건의 부모를 괴물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옳다. 하지만 괴물이라는 단어로 그들을 인간의 바깥으로 추방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놓친다. 어떻게 인간이 그 지점에 이르는가. 무엇이 공감을 소멸시키는가. 그 과정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악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공감이 작동하지 않는 자리 어디에나 있다. 아이의 울음을 듣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으로 자라고, 결국 타인을 도구나 장애물로 보게 되는 것. 그 스펙트럼은 넓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 스펙트럼의 완전한 바깥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괴물이라는 말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하지만 그 편안함을 의심해야 한다. 진짜 질문은 '저 사람은 왜 저런 괴물인가'가 아니다. '인간은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가는가' — 그리고 '우리는 그 능력을 지키고 있는가'. 그것이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