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의자가 되려 한 화가

앙리 마티스

by Polymath Ryan


마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편안한 의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삶에 지친 사람이 그림 앞에 서는 순간, 잠시 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 편안함을 만들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색채와 싸우고, 형태와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웠다. 행복을 그리기 위해 평생을 고통스럽게 작업한 화가가 앙리 마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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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곡물 상인이었고, 마티스는 법률 공부를 했다. 화가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스물한 살, 맹장 수술 후 요양 중에 어머니가 그림 도구를 사다 줬다. 처음 붓을 잡은 순간, 그는 '내가 평생 할 일을 찾았다'고 느꼈다. 늦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늦은 시작이 오히려 그를 더 집요하게 만들었다.


10년을 연습해서 어린아이처럼


마티스의 철학은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된다. '나는 10년을 연습해서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어린아이의 그림이 자유로운 것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그 두려움 없는 상태에 기술을 더하려 했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걷어내고 본질만 남기는 것, 그것이 그의 평생의 작업이었다.


그에게 예술은 감정의 직접 전달이었다.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각에 직접 닿는 것. 사과를 그릴 때 사과처럼 보이게 그리는 것보다, 사과를 봤을 때의 감각 — 그 둥글고 붉고 생동감 있는 느낌 — 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색채가 핵심이 됐다. 형태를 정확하게 그리는 것보다, 색이 주는 감각적 충격이 감정에 더 직접적으로 닿기 때문이다.


색채는 왜 폭발했는가


마티스가 원색을 거침없이 쓰기 시작한 데는 시대적 맥락이 있다. 19세기 말 유럽은 기존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 시대였다. 철학에서는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과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의 상식을 뒤흔들었으며, 음악에서는 드뷔시가 화성의 질서를 해체했다. 미술에서도 '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티스의 원색은 그 시대적 폭발의 일부였다.


결정적 계기는 두 가지였다. 1904년, 마티스는 남프랑스 생트로페에서 점묘파 화가 폴 시냐크와 여름을 보냈다. 시냐크는 색을 작은 점으로 찍어 순수한 색채를 유지하는 방식을 썼다. 마티스는 거기서 색이 형태에서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중해의 빛이 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파리의 회색빛 하늘과 달리, 남프랑스와 북아프리카의 빛은 그림자조차 색을 가졌고, 모든 것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 경험 이후 그의 팔레트는 폭발했다.



1905년 살롱 도톰 전시회. 마티스와 동료들의 그림을 본 비평가 루이 복셀이 조롱했다. '야수들의 우리 같다'고. 거기서 야수파, 포비즘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조롱으로 붙인 이름이었지만, 마티스는 개의치 않았다. 색채가 감정을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파가 빛을 포착하기 위해 색을 섞어 부드럽게 만들었다면, 마티스는 색을 섞지 않고 원색 그대로 올려 색 자체가 에너지를 갖게 했다.


피카소라는 거울


마티스를 이야기할 때 피카소를 빼놓을 수 없다. 둘은 1906년 처음 만났다. 성격도, 작업 방식도, 추구하는 것도 달랐다. 마티스는 색채와 장식, 조화와 평온을 추구했다. 피카소는 형태의 해체, 긴장과 불안을 탐구했다. 둘은 경쟁했고, 서로의 작품을 소장했으며,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피카소는 말했다. '마티스가 없었다면 내가 무엇을 했을지 모르겠다.'


20세기 미술을 두 사람이 나눠가진 셈이다. 마티스는 색채, 피카소는 형태. 마티스가 캔버스를 빛과 기쁨으로 채울 때, 피카소는 형태를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렸지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예술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위로 그린 마지막 걸작


마티스는 70대에 암 수술을 받았다. 더 이상 오래 서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졌다. 많은 화가라면 그 시점에서 붓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마티스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 붙이는 작업, 컷아웃. 그는 침대에 누워서, 혹은 휠체어에 앉아서 색종이를 오리고 배치했다.


컷아웃 연작은 지금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일부다. '재즈', '달팽이', '푸른 누드' 연작. 붓을 잡을 수 없게 된 후에 오히려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 것이다. 형태는 더 단순해졌고, 색은 더 순수해졌다. 평생 추구해온 '불필요한 것을 걷어낸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가장 불편했던 시절의 작업이었다. 마티스는 말했다. '가위로 색 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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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그린다는 것


마티스는 1954년, 여든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은 결국 하나였다. 행복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그런데 그 행복은 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살았고, 암을 견뎠고, 몸의 한계와 싸웠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빛과 색채와 기쁨을 그린 것은,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움이 필요하다는 믿음에서였다.


편안한 의자가 되고 싶다고 했던 화가. 하지만 그 의자를 만들기 위해 그는 평생 불편하게 살았다. 10년을 연습해서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웠고, 비평가의 조롱을 원동력으로 삼았으며, 붓을 잡을 수 없게 된 후에는 가위를 들었다. 마티스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편안함이 얼마나 치열하게 만들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