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 27

공평 vs 공정

by Polymath Ryan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공평은 공정에 양심이 들어간 것이라고.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오래 걸려있던 것이 자리를 잡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공평과 공정을 같은 말처럼 써왔다. 공정하다고 하면 공평한 것이고, 공평하다고 하면 공정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둘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우리의 많은 대화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개념이 흐려지면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으니까. 공정을 외치는 사람과 공평을 외치는 사람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는 장면, 우리는 그것을 매일 목격한다. 회사에서, 정치에서, 가정에서.


공평과 공정.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은 규칙이다. 같은 기준, 같은 절차, 같은 잣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 마라톤 대회에서 모든 참가자를 같은 출발선에 세우는 것이 공정이다. 입사 시험에서 모든 지원자에게 같은 문제를 주는 것이 공정이다. 법 앞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다뤄지는 것이 공정이다. 공정은 과정을 보장한다. 절차가 올바르게 지켜졌는가, 규칙이 동일하게 적용됐는가를 묻는다.


공정이 무너지면 신뢰가 무너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관대한 규칙은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편의다. 공정은 사회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특히 지금 젊은 세대가 공정에 민감한 것은 당연하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아야 하고, 특혜는 용납할 수 없으며, 규칙은 예외 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요구 — 그것은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다.


하지만 공정에는 한계가 있다. 공정한 과정이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 같은 출발선에 세워도, 출발선에 서기까지의 조건이 달랐다면 — 그 공정한 경쟁이 과연 온전히 공정한가. 공정은 지금 이 순간의 규칙을 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전의 이야기를 보지 않는다. 그것이 공정의 맹점이다.


1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구체적인 질문을 해보자. 1억 원의 예산을 세 팀에게 나눠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3333만 원씩 주는 것은 얼핏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 결과의 평등에 가깝다. 차이를 무시하고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반면 각 팀의 역량과 성과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것이 공정이다. 기준이 명확하고 동일하게 적용됐다면, 결과가 달라도 공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역량이 부족한 팀에게 예산을 더 주는 것이 공평한가. 그렇지 않다. 역량이 안 되는 곳에 예산을 퍼주면 예산은 낭비되고, 역량 있는 곳은 오히려 제약을 받으며, 결과적으로 전체가 손해를 본다. 공평을 약자에게 무조건 더 주는 것으로 오해하는 순간, 공평은 선의를 가장한 비효율이 된다. 그것은 공평이 아니라, 공평이라는 이름의 회피다.


공평의 본질은 약자 편들기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역량 있는 팀에게 충분한 예산을 주어 최대 성과를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것이 진짜 공평한 분배다. 역량이 부족한 팀에게 필요한 것은 예산이 아니라 역량을 키울 기회와 환경일 수 있다. 돈을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왜 역량이 부족한지를 먼저 보는 것 — 그것이 양심이 들어간 공평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 예산의 목적이 무엇인가. 성과를 보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등 지급이 맞다. 역량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지원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공정과 공평은 절대적 원칙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분배인가라는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그 목적을 먼저 합의하지 않으면, 공정 대 공평의 논쟁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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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이란 무엇인가


공평은 공정에 양심이 들어간 것이다. 규칙을 지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것이 옳은가를 묻는 것. 절차가 맞더라도 결과가 부당하다면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 그 불편함이 양심이고, 그 양심이 공정을 공평으로 끌어올린다.


키가 다른 세 사람이 담장 너머를 보려 한다. 모두에게 같은 높이의 발판을 주면 공정하다. 규칙은 지켰다. 하지만 키가 작은 사람은 여전히 담장 너머를 볼 수 없다. 공평은 키에 맞게 다른 높이의 발판을 주는 것이다. 단, 발판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담장 너머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 그 목적을 놓치면 공평은 형식이 된다. 발판만 나눠주고 아무도 담장 너머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평이 아니라 공평의 흉내다.


철학자 존 롤스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태어날지 모른 채로 사회의 규칙을 설계한다면, 우리는 어떤 규칙을 만들 것인가. 가장 약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 — 그것이 공평의 본질이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질문이 양심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단순히 약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더 잘 작동하게 만드는 것임을 롤스는 말하고 싶었다.


개념이 무기가 될 때


공정과 공평이 흐려지면 두 개념 모두 무기가 된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공정을 외치고, 불리할 때는 공평을 외친다. 공정의 언어로 타인의 처지를 외면하고, 공평의 언어로 자신의 노력 부족을 가린다. 개념이 도구가 된 순간, 대화는 진실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는 싸움이 된다.


공정만 남고 공평이 사라진 사회는 차갑다. 규칙은 지켰으니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지라는 논리. 출발 조건의 차이가 지워지고, 구조적 불평등이 개인의 실패로 환원된다. 반대로 공평만 남고 공정이 사라진 사회는 무기력하다. 역량과 노력의 차이가 무시되고, 결과의 평등만을 추구하다 보면 아무도 최선을 다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즉 공정과 공평은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어가 아니다. 그 단어 뒤에 있는 감각이다. 규칙이 맞더라도 이것이 옳은가를 묻는 불편함. 공평을 단순히 약자 편들기로 오해하지 않는 시선. 역량에 맞는 기회를 주는 것이 진짜 공평임을 아는 판단력. 그리고 분배의 목적을 먼저 함께 묻는 자세를 찾아야 한다.


공평은 공정에 양심이 들어간 것이다. 양심은 규칙을 넘어 사람을 보는 것이고, 결과를 넘어 목적을 보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을 넘어 그 이전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은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규칙을 지켰다는 안도감이, 그 너머를 보려는 시선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 그것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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