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30기 후기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을 때.

by Polymath Ryan


아내와 빨래를 접으며 종종 보는 '나는 SOLO' 연예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장면에서 멈췄다. 한 남자가 카메라 앞에서 울고 있다. 대단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평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왔는데 , 결국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 그는 크게 울었다. 그동안 자신을 숨기려 했던 시간들, 평범하게 보이려 애썼던 날들, 그 과정에서 쌓인 상처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질문이 생겼다. 나는 나에 대해 그렇게 깨달은 적이 있는가.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을 느끼며 살까. 자신을 알아가는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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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관리하며 산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에 맞게 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조율한다. 그것이 자기 인식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자기 연출에 가깝다. 자신을 아는 것과 자신을 포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내면에 '그림자'가 있다고 했다.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면, 보고 싶지 않은 면, 의식 밖으로 밀어낸 부분들. 우리는 그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 많은 에너지를 쓴다. 바쁘게 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한다. 고요해지면 자신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자신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평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하며 산다.


현대 사회는 이 회피를 더 쉽게 만들었다. 스마트폰을 들면 언제든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콘텐츠는 무한하고, 자극은 끊이지 않는다.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며 고독은 불편한 것이 됐고, 침묵은 채워야 할 공백이 됐다. 자신을 모른 채로 살기가 그 어느 때보다 쉬운 시대다.


깨달음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은 어떻게 오는가. 대개 선택이 아니다. 어떤 계기가 우리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올 때 일어난다. 큰 실패, 예상치 못한 상실, 오래된 관계의 끝, 혹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서 밀려온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과 실제 자신 사이의 간극을 갑자기 보게 된다.


그 남자가 카메라 앞에서 울었을 때,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 감당해야 할 것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 순간 터진 것은 새로운 앎이 아니라, 오래 눌러왔던 외면의 무게였다.


그래서 그런 순간의 눈물은 특별해 보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해방의 눈물에 가깝다. 오랫동안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순간의 눈물이다. 자신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이었는지를,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느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면, 굳이 명언이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숨 쉬는 법을 알듯이, 자신을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면 누군가 그것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했다.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를 모른다'는 인식이 자기 이해의 출발점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질문이 멈춘다. 모른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그 남자가 자신이 평범하다고 확신하는 동안은, 자신을 볼 수 없었다. 그 확신이 흔들린 순간, 비로소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불가능함이 질문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완전히 알 수 없더라도, 조금씩 더 알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것,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때로는 타인의 눈을 거울 삼는 것을 시작한다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작은 발걸음이다.


인간은 자신을 알며 살까.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품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카메라 앞에서 울던 그 남자는, 그날 이후 조금 다르게 살 것이다. 자신을 숨기는 데 쓰던 에너지를, 자신답게 사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아는 것의 의미다. 완벽한 자기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조금 더 정직해지는 것. 그리고 그 정직함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