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르네상스형 리더로
요즘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당신의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 변호사, 회계사, 의사, 번역가, 기자, 디자이너. 한때 전문직이라 불리며 안정적이라 여겨졌던 직업들이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진다. 맥킨지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일자리의 30퍼센트가 자동화될 수 있다고 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은 현존하는 직업의 47퍼센트가 20년 안에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고등학교 2학년의 아들이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필자는 한번도 안해 본 고민을 아들이 하는 것을 보며 느끼는 감각이 있다.
아들처럼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과 마치 내가 서 있는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왜 필자는 직업이 사라진다는 말이 이토록 흔들리는가의 질문이 시작된다.
우리는 언제부터 직업이 곧 나였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있다. '무슨 일 하세요?' 직업은 자기소개의 첫 번째 항목이 됐다. 명함에는 이름보다 직함이 더 크게 적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직업이 곧 자신이 됐을까.
산업혁명 이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았다. 농부는 농사를 지었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고, 아버지였고, 신앙인이었다. 직업은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이 삶에서 분리됐다. 공장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구조가 생겼고, 직업은 점점 정체성의 중심이 됐다. 결국 우리는 부속품에 불과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가 '나는 누구인가'를 대신해 '어디서 얼마나 쓸모가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 구조 안에서 직업의 소멸은 단순한 수입의 상실이 아니라 자아의 소멸처럼 느껴진다. 20년간 회계사로 일한 사람에게 'AI가 당신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직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이 이토록 무겁게 들리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이 공포를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이 공포는 처음이 아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방직공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를 부수며 저항했다. 그들의 두려움은 정당했다. 실제로 많은 방직공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방직 기계는 새로운 산업을 만들었고,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마부가 사라졌지만 자동차 정비사가 생겼다. 전화교환원이 사라졌지만 통신 엔지니어가 생겼다. 엘리베이터 기사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채워졌다.
인류는 늘 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매번 적응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가. 나는 여기서 섣불리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번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술 혁명은 주로 육체노동을 대체했다. 기계가 사람의 근육을 대신했다. 하지만 AI는 지적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법률 문서를 검토하고, 의료 이미지를 판독하고, 기사를 쓰고, 코드를 짠다. 지금까지 '기계는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영역들이 무너지고 있다. 속도도 다르다. 과거의 변화는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났다. 지금은 몇 년 안에 일어나고 있다. 적응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
그렇다면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공감, 창의성, 직관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솔직해져야 한다. 이것들도 점점 위협받고 있다. AI는 이미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고, 소설을 쓴다. 감정을 인식하고 공감하는 척하는 능력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AI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왜 이 질문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것. AI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푼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중요한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는 아직 인간의 영역이다. 삶의 맥락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과 실패와 상실을 경험하며 쌓인 지혜,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진짜로 반응하는 능력은 공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 AI는 최적화된 답을 낸다. 하지만 인간은 비효율적이고, 감정적이고, 때로는 논리를 벗어난 선택을 한다. 그 비효율 속에 예술이 있고, 사랑이 있고, 혁명이 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폴리매스의 시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가지 직업, 한 가지 기술에 올인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진 시대가 왔다. 하나의 기둥으로 서 있는 사람은 그 기둥이 흔들릴 때 함께 무너진다. 여러 기둥을 가진 사람은 하나가 흔들려도 서 있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들을 생각해보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이자 과학자이자 공학자이자 음악가였다. 괴테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식물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자이자, 준 프로급 바이올린 연주자 였다. 그들을 폴리매스, 즉 다방면에 걸쳐 깊이 아는 사람이라 부른다. 한때 폴리매스는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 시대착오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다시 폴리매스를 요구하고 있다.
AI가 가장 잘하는 것은 한 분야의 깊은 지식을 처리하는 것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특정 영역에서 인간을 능가한다. 하지만 AI가 아직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하는 것. 음악의 원리를 수학으로 보고, 역사의 흐름을 생물학으로 해석하고, 건축의 언어로 사회를 읽는 것, 즉 경계를 넘나들고 연결하는 사람, 전혀 다른 두 세계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AI 시대에 살아남는 인간의 모습이다.
폴리매스는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분야에 진짜 관심을 갖고, 그 사이의 연결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음악을 알면서 과학을 보는 사람, 역사를 알면서 현재를 읽는 사람, 예술을 알면서 기술을 다루는 사람. 그 연결이 만들어내는 것을 AI는 아직 모방하지 못한다.
직업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야 한다
직업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 더 두렵다. 직업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 무엇을 할 때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는 AI가 대신 알아줄 수 없다.
산업혁명 때 살아남은 것은 가장 빠른 방직공이 아니었다. 변화를 읽고 새로운 방향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AI 시대에 살아남는 것도 가장 빠른 데이터 처리자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다양한 것을 연결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의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직업은 당신의 일부일 뿐이다. 당신이 가진 호기심, 감각, 연결하는 능력, 공감하는 마음들은 어떤 AI도 빼앗아갈 수 없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더 좁은 전문가가 아니라, 더 넓은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