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누군가 좋은 자리에 임명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국립오페라단 단장, 예술의전당 사장, 혹은 문화 기관의 수장이 그것이다. 그 소식이 채 퍼지기도 전에 자격이 없다, 낙하산이다,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SNS는 들끓고, 예술계는 술렁인다. 하지만 그 반응이 너무 빠르고 너무 크다는 생각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비판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정당한가. 그리고 그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를 더 잘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하나씩 자리를 떴다. 돌을 든 손이 무거워진 것이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떤 자리에 누군가 임명될 때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조용히 살펴보면, 그 비판의 상당 부분이 그 자리와 관계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혹은 그 자리를 원했지만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혹은 그 분야의 구조적 문제에 오랫동안 눈을 감아온 사람들에게서도 말이다.
비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공적 자리에 임명된 사람에 대한 검증은 필요하다. 하지만 비판에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자격은 그 자리를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이 비판하는 문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인은 무엇을 해왔는가, 그 질문들 앞에서 정직할 수 있는가. 그것이 돌을 들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들이다.
돌을 드는 것은 가볍지 않다. 비판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막 새로운 자리를 맡은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판은 그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무게를 더한다. 그 비판이 정당한 것이라면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자격 없는 비판, 감정에서 비롯된 비판, 구체적인 근거 없는 비판은 돌로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임명된 사람을 향한 비판은 넘쳐나지만 임명한 사람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는 것이다. 부적절한 임명이 이루어졌다면, 그 책임은 임명된 사람보다 임명한 사람에게 더 크다. 잘못된 기준으로 사람을 뽑은 것, 로비에 흔들린 것, 검증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 이것들이 진짜 문제의 뿌리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에만 반응하고 원인에는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임명된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 임명을 가능하게 한 구조는 보지 않는다. 이것은 편리한 분노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향해 돌을 드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돌이 날아가야 할 진짜 방향은 다를 수 있다. 시스템, 관행, 그 자리를 둘러싼 오래된 문화를 바꾸는 것은 훨씬 어렵고, 훨씬 덜 짜릿하다. 임명한 구조는 거대하기도 해서 그렇다.
예술 기관의 수장 자리를 둘러싼 전문성과 행정력의 균형, 정치적 임명의 관행, 예술계 내부의 파벌과 이해관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누가 그 자리에 앉아도 비판은 반복된다. 그렇다면 비판의 에너지를 구조를 바꾸는 데 써야 한다. 사람을 향한 돌 대신, 구조를 향한 질문을 해야한다.
그리고 비판을 받는 사람은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자리에 만족할 것인가의 질문을 스스로 해야한다.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자리만을 위한 자리가 되서는 안된다. 명예는 자리에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주어진 자리는 그만큼의 무게가 무겁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간사하기에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변하는 순간의 경계에서 자신을 늘 돌아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그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다.
걱정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기관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예술이 제대로 지원받기를 바라는 마음, 걱정과 염려는 귀하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것을 비판으로 끝내는 안 된다. 비판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한번에 시대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정치적인 성향을 선택하여 그들의 지위를 성장시킨 사람도 있지만, 그 시작은 당시 미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보완하려는 스스로의 투쟁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본질을 찾아 더 깊고 넓게 미술이라는 장르는 성장시킨다. 오랜 시간의 스스로의 투쟁은 길바닥의 미술을 교회와 왕들에게 꼭 필요한 무기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미술은 중앙으로 파고 들었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이미 답을 보여준 것이다.
걱정이 있다면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새로 임명된 사람이 잘 하도록 돕는 것, 그가 모르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 그가 실수할 때 건설적으로 지적하는 것. 비판은 거리를 두고 돌을 던지는 것이지만, 관여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이다. 진짜 걱정된다면, 돌이 아니라 손이 필요하다.
물론 손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할 수 있다. 목소리를 냈다가 무시당할 수 있다. 그래도 시도하는 것이 돌을 드는 것보다 낫다. 적어도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문제를 가리킬 수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내가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면, 후대를 위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
비판의 자격과 책임
앞서 예수님의 말씀은 비판을 금지한 것이 아니다. 비판의 무게를 느끼라는 것이다. 돌을 드는 순간, 그 돌의 무게를 먼저 느껴보라는 것이다. 내가 이 돌을 들 자격이 있는가. 이 돌이 날아가야 할 방향이 맞는가. 이 돌을 던진 후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또한 들을 자신이 없다면 명예는 버려야하고, 자리에 연연하는 악역으로 영원히 남게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누군가 좋은 자리에 임명됐다.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자리를 더 잘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 나의 걱정은 그를 향한 돌인가, 아니면 그를 향한 손인가. 그 질문들 앞에서 정직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돌을 들어도 된다 아니, 무조건 들어서 던져야 한다. 그것도 우리의 책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