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타노 도니제티
피 묻은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무대에 나타난다. 눈빛은 공허하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다. 그녀는 방금 신랑을 죽였지만 그것을 모른다. 그녀의 정신은 이미 이 세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아름답고 길고 심오한 노래를 부른다. 객석은 침묵한다. 200년 전 나폴리의 관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이 장면 앞에서 사람들은 숨을 멈춘다.
1835년 9월 26일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초연됐다. 초연 직후 관객들은 기립했다. 당시 비평가들은 '오페라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썼다. 그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낭만주의 — 이성에 반발한 시대
루치아를 이해하려면 1835년이라는 시대를 먼저 봐야 한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을 인간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감정은 통제해야 할 것, 광기는 극복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초 낭만주의는 그 질서에 정면으로 반발했다. 이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 직관, 광기, 죽음을 오히려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베토벤이 방금 세상을 떠났고, 슈베르트가 짧은 생애에 수백 편의 가곡을 남겼으며, 쇼팽이 피아노 앞에서 우수와 열정을 쏟아냈다. 문학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완성됐고, 바이런과 키츠가 요절하며 낭만주의의 아이콘이 됐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아름다움 안에 비극이 있고, 비극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루치아를 만들었다.
월터 스콧의 소설 '래머무어의 신부'가 원작이다. 스코틀랜드의 두 가문 사이에 낀 루치아는 사랑하는 에드가르도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결혼 첫날 밤 루치아는 신랑을 죽이고 광기에 빠진다. 낭만주의가 사랑한 억압된 감정,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광기, 죽음등 모든 요소가 여기 있다.
도니체티 — 천재와 비극
가에타노 도니체티는 1797년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시몬 마이르에게 발탁되어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작품을 썼다. 평생 70편이 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루치아 외에도 '사랑의 묘약', '돈 파스콸레' 같은 걸작들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하지만 도니체티의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다. 세 아이를 모두 잃었고, 사랑하는 아내 비르지니아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말년에 그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광기를 음악으로 그렸던 작곡가가 결국 광기에 사로잡혔다. 루치아를 작곡한 지 10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848년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를 쓸 때, 도니체티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상실의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음악이었다. 루치아의 광기는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었다. 작곡가 자신의 내면과 맞닿아 있었다.
광란의 아리아 — 왜 광기는 아름다운가
3막, 루치아가 등장하는 순간 오페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라간다. 피 묻은 드레스, 공허한 눈빛. 그녀는 사랑하는 에드가르도와 함께 있는 상상 속에 있다. 현실의 참혹함을 감당할 수 없는 정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세계였고, 그 세계 안에서 루치아는 행복하다. 그리고 그 행복을 노래한다.
이 아리아가 경이로운 이유는 음악과 상황의 역설 때문이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유리 피리와 함께 높이 올라가며 흔들리는 그 소리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섬뜩하다. 아름다움과 공포가 같은 순간에 존재한다. 이것이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미학이다. 숭고한 것은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루치아의 광기는 약함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 한 인간의 한계다. 사랑을 빼앗기고, 의지에 반하는 결혼을 강요당하고, 그 모든 것을 침묵으로 견뎌야 했던 여인. 그 억압이 폭발하는 순간이 광기다. 그리고 그 광기를 노래로 표현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왜인가. 우리 안에도 그 억압이 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어서 쌓인 것들이 루치아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다.
오페라가 존재하는 이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묻는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견디는가.
루치아는 광기로 도망쳤다. 하지만 도니체티는 그것을 음악으로 붙들었다. 그리고 200년간 수많은 소프라노들이 그 음악을 통해 루치아의 고통을 다시 살았다. 객석의 관객들은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울었다.
오페라는 인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함께 경험하는 예술이다.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극단적인 고통을 노래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안다. 사랑을 잃는 것,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받는 것, 그것을 견디다 무너지는 것. 루치아의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귀족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곳에나 있는 인간의 이야기다.
피 묻은 드레스의 루치아가 노래할 때, 우리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루치아를 본다. 말하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 순간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은 가볍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이 예술이 될 만큼 깊고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200년간 살아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