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를 처음 본 사람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by Polymath Ryan


1543년은 과학사에서 특별한 해다.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스물여덟 살의 젊은 의사가 또 하나의 책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을 펴냈다. 저자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을 바꿨다면, 베살리우스는 인간의 몸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봤다. 같은 해에 우주와 인체가 동시에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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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살리우스 이전에도 해부학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해부학이 아니었다. 1000년간 갈레노스의 말을 읽는 것이 해부학이었다. 베살리우스는 그 관행을 깨뜨렸다. 직접 칼을 들고, 직접 시신을 열고, 직접 눈으로 봤다. 그리고 갈레노스가 틀렸다고 말했다.


1000년의 오류


갈레노스는 2세기 로마의 의사였던 그는 방대한 의학 저술을 남겼고, 당대 최고의 의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인체 해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로 원숭이와 돼지를 해부해 인체를 추론했다. 그 추론이 대부분 틀렸다. 인간의 턱뼈는 하나인데 갈레노스는 두 개라고 했다. 간에서 혈액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심장의 좌심실과 우심실 사이에 구멍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오류는 1000년 넘게 교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중세 유럽에서 교회도 인체 해부를 금지했다. 시신은 부활을 기다리는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학 교육은 갈레노스의 텍스트를 읽고 암기하는 것이었다. 해부학 강의가 있을 때도, 교수는 높은 자리에 앉아 갈레노스의 책을 읽고, 조수가 시신을 열고, 이발사 외과의가 칼을 들었다. 교수는 직접 손대지 않았다. 책에 써있는 것이 현실보다 더 권위가 있었다.


이 구조 안에서 오류는 교정될 수 없었다. 눈앞의 시신이 책과 다른 것을 보여줘도, 학생들은 책이 맞고 시신이 틀렸다고 배웠다. 혹은 시신이 기형이라고 넘겼다. 권위가 현실을 이긴 것이다.


베살리우스 — 직접 칼을 든 교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1514년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의사 집안이었고, 어릴 때부터 해부에 집착했다. 동물을 해부하고, 묘지에서 뼈를 주워 연구했다. 파도바 대학에서 의학을 가르치게 됐을 때, 그는 기존의 방식을 바꿨다. 교수가 직접 해부대에 서서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보면서 갈레노스가 틀렸다는 것을 하나씩 확인했다. 턱뼈는 하나였다. 심장 벽에는 구멍이 없었다. 간은 다섯 개의 엽이 아니라 두 개였다. 갈레노스가 원숭이를 해부해 인간이라고 기술한 오류들이 드러났다. 베살리우스는 그것을 기록하고, 정밀한 삽화와 함께 책으로 펴냈다. 300개가 넘는 삽화. 인체의 뼈대, 근육, 혈관, 신경. 그것들이 처음으로 정확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베살리우스가 위대한 것은 갈레노스의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는 갈레노스를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갈레노스도 인체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틀렸을 뿐이라고 했다. 권위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방법을 바꾼 것이다.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그 전환이 해부학의 나아갈 길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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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선구자


베살리우스 이전에 인체를 직접 들여다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30구 이상의 시신을 해부하며 정밀한 그림을 남겼다. 심장, 폐, 태아, 근육의 구조를 놀라운 정확도로 그렸다. 하지만 그의 해부학 노트는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노트는 흩어졌고, 수백 년간 알려지지 않았다.


예술가가 과학의 경계를 넘어 인체를 탐구했지만, 그 발견이 세상과 공유되지 못했다. 반면 베살리우스는 인쇄술이라는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의 책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같은 발견이라도, 공유되어야 지식이 된다. 다빈치의 발견은 묻혔고, 베살리우스의 발견은 퍼졌다.


본다는 것의 혁명


베살리우스가 일으킨 혁명의 본질은 해부학 지식의 교정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권위보다 관찰을, 텍스트보다 현실을, 암기보다 탐구를 우선시하는 태도. 그것이 과학혁명의 정신이었고, 베살리우스는 그 정신을 의학에 가져온 사람이었다.


그는 스물여덟 살에 그 책을 펴냈다. 그리고 이후 황제 카를 5세의 주치의가 됐다. 말년에는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난파선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564년, 쉰 살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해에 책을 낸 그 해부학자는, 같은 해에 또 다른 혁명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갈릴레오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1543년에 시작된 것이 1564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우주를 보는 눈이 바뀌고, 인체를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변화가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베살리우스가 해부대 앞에서 칼을 들었을 때, 그는 단순히 시신을 열었던 것이 아니다. 1000년간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