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골기질이 있다. 소위 홍대병이라고도 한다. 유행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좋아하던 것도 유행이 되면 마음이 식는다.
어느 순간 다정함이 유행이 된 거 같았다. SNS와 문고는 다정함이라는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필요성은 알았지만 반발심이 들었다. 다정하지 않겠다는, 그런 유치한 마음이 아니다. '다정함이 어렵나? 그냥 따뜻하면 되는 건데? 이렇게 많이 언급할 이유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 나오니까 알았다. 다정은 어렵다. 나 살기에도 바쁜데 타인에게 마음을 베풀기란 쉽지 않다. 경쟁도 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면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우리는 다정함을 잊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다정함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우리는 화가 많아진 거 같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의자에 앉은 채 자리가 좁다며 화를 내고, 왜 쳐다보냐며 소리를 지르고, 무빙워크에서 빨리 걷지 않는다며 육두문자를 날린다.
이러한 문제는 뉴스에서도 나온다. 우발적 범행, 묻지마 ㅇㅇ. 그리고 전쟁. 특히 전쟁은 증오를 담고 있는데, 타인을 배척하려는 마음이 기저인 것 같다.
(전쟁으로 인해 힘든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다정과 멀어졌다. 정치, 세대, 남녀 갈등이 참 많다. 나는 이 시대가 혐오의 시대가 된 건 아닌지 생각했다.
우연히 영화 한 편을 봤다. 그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영화를 보고 왜 다정함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영화는 다중우주가 기본 환경이다. 한 행성에서 딸에게 잘못된 사랑으로 상처를 준 어머니가 있다. 딸은 그로 인해서 강한 힘을 갖게 된다. 미움으로 마음이 꽉 찬 그녀는 세상을 파괴하려는데, 다른 우주의 어머니가 그녀를 구하는 얘기다. 영화의 핵심은 딸의 아버지가 말하는 다정함이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딸에게 다가가서 딸을 보듬어 준다. 그렇게 세상을 구한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 내용이다.
다정함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면서 가벼워진 경향이, 단어 자체가 친숙해서 잘 각인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해, 포용, 관용, 배려, 친절 등의 단어를 쓰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영화는 줄기차게 다정함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예전에 봤던 다른 영화 '원더'의 대사가 떠올랐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할 땐 친절함을 선택하라"
이 영화는 친절과 서로에 대한 이해로 성장해 나가는 어린 친구들의 이야기다.
두 영화로 알 수 있듯 다정, 이해, 포용, 관용, 배려, 친절 등의 행동은 주변을 긍정적으로 바꾼다. 나는 이러한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더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혐오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라고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거창했다. 봉사와 기부를 많이 해야 하는가? 그것도 맞지만 일상 속에 사소하게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별거 없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작게라도 위로를 건네고, 따뜻한 말을 하고, 작은 도움을 주고, 한 번 더 웃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동료가 혼자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으면 도와주거나, 대중교통에서 교통약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힘든 친구가 있으면 함께 밥을 먹으며 위로해 주는 등 말이다. 이것뿐이겠는가? 자신의 도움이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뭐든 좋다!
이런 배려는 분명히 받은 사람의 가슴에 남는다. 따뜻한 걸 알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나는 믿는다. 작은 따뜻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영화의 대사를 던지고 끝내려 한다. 그럼 부디 모두가 다정하길.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