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름의 역사_노세 노세 편

80대가 시골에서 노는 법?

by MJ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의 여름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흘러가곤 했다. 말하자면 요일 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오늘이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 알 수가 없고, 낮이 너무 길다 싶으면 어느새 밤이 되어 있다. 더위와 씨름하며 까무룩 잠이 들면 또다시 아침이 찾아오는, 매일매일이 어제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이 할머니 집에서 흘러간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휴가철이 시작되어 할머니 댁에 도착하는 순간, 월화수목금토일 지나 다시 월요일이 다가오는 것이 싫던 쳇바퀴 같은 나날들은 이제 안녕. 학교 때문에 일찍 잠들어야 하고 꾸역꾸역 억지로 학원 가야 하는 날들도 안녕. 나에게 남은 일은 놀기 놀기 놀기! 먹고 수영하고 놀고 간식 먹고 슈퍼 갔다가 저녁 먹고 사촌들과 함께 만화 영화 보다가 모기와 씨름하고 잠드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몇 밤이 흘렀는지, 지금 날짜가 며칠인지도 감이 오지 않는다. 거실에 놓인 수협 달력을 보다 문득 깨닫는 것이다. 아, 7월이 다 갔구나. 아, 벌써 8월 첫 주가 끝났구나.

그 와중에 근근이 요일을 실감시켜 주는 것 중 하나가 만화영화였다. 초등학교 때는 투니버스를 필두로 애니메이션 채널이 성행하던 시기였는데 이누야샤, 아따맘마, 달빛 천사, 명탐정 코난, 학교 괴담 등 그야말로 만화영화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만화 영화 상영 시간은 매일 아침 할아버지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 맨 뒷장에 다른 채널 편성표와 함께 적혀있었다. 어느 채널에서 어떤 만화 몇 화가 방영이 되는지 밑줄까지 쳐가면서 챙겨 봤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는 못 보는 만화영화를 할머니 집에서는 실컷 보았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누군가가 빌려온 만화책 더미에 파묻혀 하루 종일 만화책을 보기도 했다. 동네 초입의 작은 만화방에서 빌려왔으리라 집작 되는데, 어른용 만화책은 그때 입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여름에도 할머니 집에서 만화책을 더미로 쌓아놓고 추억여행을 떠나는 다소 낭만적인 계획도 세워보았지만 종이 만화책을 대여해 주는 책 대여점이 사라졌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만화영화만 볼 수도 없고, 뭘 하면서 놀면 좋담?

특히 이번 여름은 오랜만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니만큼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는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 흠. 난 할머니 할아버지랑 6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데, 반세기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끼리는 뭘 하고 놀면 좋을까. 화투? 그건 쨉이 안된다. 노래? 춤? 애창곡이 다를뿐더러 일단 동네에 노래방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렵다. 특히 시골은 나이 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페도 영화관도 없고, 노래방도 읍내에 가요주점 밖에 없는 이곳에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도대체 뭘 하시면서 노시는 걸까? 그 단서는 동네 골목길을 한번 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름밤 동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집집마다 불은 꺼져 있지만, 창문마다 텔레비전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늦은 밤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 놓고 보다가 주무시는 것이 낙이다.

요즘 엄마도 할머니를 구박하고 있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할머니가 누워서 '테레비'만 보신다는 것이다. 친구들도 만나고 집 앞이라도 외출도 좀 하시고 운동도 좀 하시면 좋을 텐데 당최 누워서 티브이만 보거나 잠만 주무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7-80대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제한적이다. 운전을 하기도 어렵고 시골에서는 딱히 갈 곳도 없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좁을 수밖에 없고, 친구를 만나기도 어렵다.

그리고 웃픈 우리 할아버지 말씀. 친구들이 다 죽고 놀 사람이 없단다. 또래 친구도 없고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처지를 떠올리니 안타까움이 밀려옴과 동시에 왜 만날 '테레비'만 보시는지 이해가 된다.


뭘 하지 않아도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이번 여름휴가를 할머니 집에서 보낸 지도 며칠이 흘렀다. 밥을 해 먹고, 읍내에 가서 장도 보고, 목욕탕을 함께 가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옛날 올림픽, 월드컵 경기 같은 것을 함께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지금 이 순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다.

할머니, 이것도 노는 것 맞죠? 내일은 같이 드라이브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