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간다고 하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 집에 갈 때는 긴 시간 드라이브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도시와 할머니가 사시는 바닷마을까지 바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없었다. 근처 다른 도시까지만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한 시간, 남은 거리는 국도로 1시간 30분 정도는 더 달려야 했다.
마치 정한 것처럼 톨게이트를 벗어나 첫 휴게소를 꼭 들르곤 했는데, 항상 갓 구운 따끈한 호두과자를 한 봉지 사서 온 가족이 나눠먹으며 다시 차를 달리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할머니집으로 곧장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생겨 더 이상은 방문하지 않게 되었지만 다른 어느 휴게소에 가 보아도 그때만큼 맛있는 호두과자를 먹어본 적이 없다.
시간 단축이라는 효율적인 목표 아래 사라져 버린 풍경들이 더 있다. 바로 할머니 집으로 가는 동안 볼 수 있었던 국도 변의 풍경들이다. 할머니 집은 바닷가 마을이지만 근처 다른 도시까지만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풍경은 바다가 아닌 드넓은 논밭이었다.
여름에는 새파란 하늘 아래 깔린 연둣빛 논과 밭, 날아가는 하얀 새들. 해 질 녘에는 떨어지는 해가 서쪽 산등성이에 걸려 분홍빛으로 물들던 모습. 그리고 졸린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 나와 동생. 자동차는 계속 달리고 익숙하지만 지명을 모르는 곳이 차창 밖을 지나간다.
더 달리다 보면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다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동쪽으로 논밭 너머 푸른 기운이 아스라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곧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연둣빛과 푸른빛은 생각보다 꽤 잘 어울린다.
푸른빛이 점점 더 가까워지면 작은 바닷가 마을들이 도로변을 따라 줄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벽 위 파란색, 주황색의 지붕들이 언덕배기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곧이어 창문 크기만 한 간판을 단 횟집, 펜션, 모텔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차창 뒤로 또 줄지어 사라진다.
차창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조금씩 더 가까워져 파도의 물결선까지 보인다면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것이다. 창문을 열고 달리고 있었다면 이미 차 안은 바다 냄새로 한가득일 것이다.
여정의 마지막은 오징어잡이 배가 옹기종기 들어서있는 작은 항구를 지나 해변 바로 옆, 구불거리는 이차선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차창 바로 밖에는 암석 위로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코너를 돌면 드디어 도착!
세 시간 동안 앉아있느라 찌뿌둥한 몸을 펴고 배낭을 챙겨 어그적거리며 차에서 내리면 익숙한 골목 입구가 보인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두 손으로는 영차 옷가방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내달리면 입구에서 네 번째, 우리 할머니 집이다.
사촌들도 여름 방학을 맞아 이미 도착해 있는지 집 안은 벌써 시끌벅적하고, 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가득 찬 신발장에 신발을 얼렁뚱땅 벗어놓고 들어가면 "왔냐-"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가 들리고 나의 여름 방학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