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약속이 있다며 나간 아들이 밤 10시가 다 되어 들어오더니 출출하다며 라면을 끓인다. 너구리 라면. 나의 최애 라면이다. 한 젓가락만 먹겠냐는 아들의 제안을 물리치지 못하고 세 젓가락에 국물까지 마셔버린다. 이 늦은 밤 라면은 최악인데 하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유혹의 맛이라니. 너구리 라면을 사는 아들을 보며 아들 친구는 너무 올드한 라면 아니냐고 했단다. 잘 나가는 라면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그 올드한 너구리 라면에서 문득 40년 전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나의 친구 중 한 명은 교수님실에서 조교를 했다. 그때 교수님의 점심은 너구리 라면이어서 항상 너구리 라면이 박스로 있었다. 교수님실에 있었는지 조교실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난한 우리들이 가끔 교수님의 너구리를 몰래 끓여 먹고 다시 채워두기를 반복했던 것을 보면 조교실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느 날은 채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늘상 돈이 없는 우리들이었으니까. 라면을 먹으면서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들키지 않았냐는 것이다. 들킨 기억은 없지만 교수님이 모르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가난한 제자들을 위해 눈감아주신 것을 우리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최애 라면이 너구리인 이유가 맛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준 라면에 대한 의리인 것 같기도 하다. 너구리 라면을 먹을 때마다 그 시절을 추억하게 해주는 존재에 대한 의리.
그때 함께 라면을 훔쳐먹었던 친구들 4명은 여전히 친구로 남아 함께 늙어가고 있다. 60이 넘은 할머니들이(실제 손주가 있는 사람은 없다. 매우 아쉽게도) 매주 수요일 밤 줌으로 만나 영어원서를 읽으면서 말이다. 그것도 2년째 지속하고 있다.
“뭐하러 이것을 하고 있지? 발전도 없는데.” 발전이 없다고 한탄하며 한 친구가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60살 할머니들이 영어원서 읽는다고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해?”
“대단하다고 하더라”
“바로 그거야. 그 말 한마디 듣기 위한 것. 아 나이에 누가 우리를 대단하다고 해주겠니. 그리고 외국어 공부는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대. 이 두 가지면 공부하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니?”
사는 지역이 각기 다른 4명의 친구들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년에 한두번. 그나마 지금은 며칠쯤 집을 비워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1년에 한두번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지만 소소한 일상을 나누기에는 사는 곳이 각기 다르다. 함께 여행하는 중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영어원서 읽기를 같이 해볼까 하다가 시작한 것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몰랐다.
벌써 4권째 함께 읽고 있다. 발전이 없음에도 포기하자고 하는 친구는 한명도 없다. 단지 전혀 발전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뿐. 모두들 자기는 발전하지 않는다고 투덜대지만 서로는 서로가 발전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발전하지 않으면 또 어떠리. 돌아서기 전에 잊어버리는 나이에 영어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만족감과 안도감을 주리라 믿는다. 인터넷의 무시무시한 발전에 주눅이 들어있는 우리가 줌이라는 공간을 통해 친구를 매주 만나 함께 배우고 익히니 이것이 현대판 공자의 3락이 아닐런지.
오늘은 그때 친구들이 좋아했던 시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다시 읽어본다. 저녁을 먹고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를 풍기며 찬 한잔을 함께 마실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