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무릎을 안고 걷다
주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걸어간 길에서의 사진이라곤 중간에 들린 바르에서 먹은 빵과 콜라가 전부이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바지를 덮지 않는 판초우의를 입은 탓에 바지는 무겁고 축축해졌다. 그덕에 당연히 걸으면서 사진도 찍지 못했다. 머물기로 한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땐 모든 체력이 방전되어 있었다. 무릎도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너 이제 걷지마” 사실 팜플로나로 향하는 길 위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팜플로나에서는 하루 더 쉬어가야겠구나.”
팜플로나는 앞서 지나온 생장과 론세스바예스 그리고 주비리와는 달리 마을보다는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순례자들이 피레네 산맥까지 올라야 하는 생장이 아닌 팜플로나를 순례길의 첫 여정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실제로 나는 팜플로나 알베르게에서 여러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팜플로나에서 순례길을 시작한다고 했다. 하지만 연박을 한다고 해서 무릎이 아프다고 해서 관광을 빼먹을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내가 팜플로나에 도착한 날짜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성금요일 당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요를 받기 위해 순례자 여권을 챙긴 뒤 알베르게 바로 앞에 위치한 팜플로나 대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서는 이미 한창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놀랍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거나 앉아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고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식료품점으로 이동했다. 그날은 성금요일이기도 했지만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한식을 먹는 날이기도 했다. 나와 J는 한국 라면을 판다는 중국인 모녀가 운영하는 가게로 향해 보드카와 라면 다섯 봉지를 사서 나왔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한강물 라면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맛있었다. 그날 알베르게 3층 주방은 두 명의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인들이었는데 팜플로나에서 순례를 시작한다는 두 아이와 함께 오신 교사 부부는 계란을 너무 많이 삶았다며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라면을 먹고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잤던 것 같다. 남들의 발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팜플로나의 마리아 공립 알베르게는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찬물로 샤워를 마치고 따듯한 침낭 안에 들어가자 곧바로 눈이 감겼다. 내일 걷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하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덟시 반에 알베르게에서 나온 뒤로는 하루종일 먹기만 했다. 양고기와 빠에야. 젤라또와 츄러스 그리고 초코라떼. 기력도 보충하고 맛있는 걸 먹었으니 무릎도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팜플로나까지 여정을 함께 한 막대기를 약국 앞에 두고 갔다가 잃어버린 탓에 순례자 매장에 들려 스틱과 기념품 뱃지도 구매했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가 무릎 찜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국에 있는 친구 H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그때 한국은 이른 저녁이었고 H는 어김없이 또 다른 친구 E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필이면 걷지 않고 연박을 하는 날에 전화가 걸려오다니. 둘은 걷기 시작한 지 며칠만에 쉰다며 나를 놀려댔지만 그래도 즐거운 통화였다.
성금요일이 하루 지난 팜플로나의 밤은 축제의 도가니였다. 원래 가고 싶었던 QR을 입력하면 메뉴 사진이 나온다는 타파스바는 서있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한 점심을 먹은 탓에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온 게 문제였다. 우리는 괜찮은 식당을 찾아 숙소에서 20분이나 떨어진 곳까지 걸어야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들어간 가게는 문어 핀초와 치즈와 하몽을 곁들인 바게트빵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맛있는 메뉴가 있진 않았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거리 탓에 왠지 모르게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해가 진 팜플로나의 거리가 정말 아름다웠다. 시골 마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도시만의 분위기였다. 사실 나는 와인 한 병을 사서 팜플로나의 대성당 앞에서 혹은 까스띠요 광장 벤치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진 못했다. 거리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팜플로나 대성당 앞은 조명이 없어 생각보다 깜깜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내가 아끼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이곳에 다시 들려 볼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일은 다시 걷는다. 지금은 그게 더 중요하다.
안녕하세요.
산티아고에서 한 달 반 동안 걸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우리 각자의 산티아고'입니다.
제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산티아고 엽서북과 순례길 이후의 여행을 담은 포루투갈 엽서북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산티아고 일기는 크라우드 펀딩이 끝나는 11/17까지 매일매일 연재되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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