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에서의 달콤했던 연박을 마치고 푸엔테 라 레이나로 향했다. 여섯시 반에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늦잠을 잔 바람에 한 시간이나 늦게 걸음을 시작했다. 한 번 상한 무릎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의 기어가는 속도로 걸었으나 그렇다고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푸엔테 라 레이나로 향하는 여정에서는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꼭 가보고 싶은 장소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연 대형 약국이 하나 있었고 구글 번역기를 켜 효과가 강한 진통제를 달라고 말했다.
약 하나 먹는다고 곧바로 무릎이 나아질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대신에 오늘부터는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기보다 나의 몸과 걸음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여보기로 했다. 무릎의 움직임이나 호흡, 스틱과 발이 동시에 땅을 짚는 순간의 리듬 같은 것들에. 웬만해서는 카메라도 거의 꺼내지 않았고 그러자 거짓말처럼 걸음에도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하루 전 날 미리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한 K로부터 길이 꽤나 힘들었다는 카톡을 받았던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여태까지 걸었던 순례길 코스 중 가장 아늑(?)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방에서 버린 것들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에겐 맞지 않던 무릎보호대와 나이키 캡 모자, 빨래 집게와 립밤 등. 비록 많은 무게를 차지하던 물건들은 아니겠지만 가방의 공간이 여유로워진 건 심적으로 꽤나 크게 다가왔다. 현재 읽고 있는 책들도 다 읽으면 머물던 알베르게에 하나씩 기부하고 갈 생각이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와 김소연의 촉진하는 밤 그리고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
오늘 순례길을 걸으면서는 무엇을 찍을까보다는 내가 순례길을 기록하기로 한 방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출국일 전날까지도 고민하다가 결국 캠코더를 들고 오지 않은 건 다시 생각해도 잘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진과 글로는 여전히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할 순간과 기억들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틈틈이 핸드폰으로 녹화 버튼을 누르곤 있으나 다음에 또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다른 이들처럼 영상을 편집해 하나의 기록물을 남기고 싶다.
용서의 언덕은 풍차 수십개가 돌아가는 산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용서의 언덕이 가진 용서의 의미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미워하고 있는 상대방을 용서하라는 의미와 나를 미워하는 상대방에게 구하는 용서. 그리고 마지막은 지금 이 곳에서 순례를 포기하더라도 당신을 용서하겠다는 의미. 질문을 떠안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덕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낭 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쓴 채 푸엔테 라 레이나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 나는 흙길 위에서 죽어 있는 작은 새 하나를 발견한다.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고 걸음을 서둘러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뒤를 돌아봤고 다시 그 새에게로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젖은 흙을 돌로 파내어 새를 묻어주었다. 그 순간에는 무릎을 굽히는 것조차 힘들어 흙과 돌을 덮어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새를 다른 곳으로 옮겨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소한 후회와 미련들에 대해서 나는 자주 생각한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해 하루를 머물 알베르게에 발을 들이자 리셉션에서 “안녕하세요! 좋아!” 별안간 낯선 한국말이 들려왔다. 덩치에 맞지 않게 가는 목소리가 귀여웠던 리셉션 직원은 그 뒤로도 마주칠 때마다 내게 “안녕!” 안부를 물어왔다. 숙소에 도착하자 해가 떴고 나는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빨래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 빨래를 널고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을 뿐인데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여행이라는 생각과 확신이 들었다. 단지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널은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니!
푸엔테 라 레이나는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지만 목가적인 풍경이 아름다운 장소였다. 강렬한 스페인의 햇살을 처음으로 경험한 장소로도 기억될 것 같다. 이곳에서의 태양은 저녁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진다. 태양빛으로 인해 내가 찍은 대부분의 사진이 자연스레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 냈는데 다른 마을에서는 건지지 못한 순간들이었다. 이외에도 사랑스러운 고양이 벽화와 벽에 공을 차며 혼자 축구를 하던 축구 유망주도 기억난다.
성당도 잊지 않고 다녀왔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혼자 서있는 기분은 콕 집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고요하고 평화로우면서도 울적하달까. 하지만 본격적으로 울적해질 때쯤이면 꼭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도 구경해도 될까요?” 그게 이곳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오늘의 하루도 어김없이 J와 맥주를 마시며 마무리했다. 맛없는 피자를 먹었지만 처음으로 맛본 레몬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내일은 에스테라로 향한다. 에스테라는 어떤 마을일까. 나의 무릎은 괜찮으려나. 날이 추운데 내일 아침까지 빨래가 다 마르려나. 이번엔 또 무슨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과 기대가 혼재된 밤이 지나간다.
안녕하세요.
산티아고에서 한 달 반 동안 걸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우리 각자의 산티아고'입니다.
제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산티아고 엽서북과 순례길 이후의 여행을 담은 포루투갈 엽서북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산티아고 일기는 크라우드 펀딩이 끝나는 11/17까지 매일매일 연재되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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