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두드리는 목소리
8년 만인가, 9년 만의 연락인가...
부탁할 게 있다며 인스타로 DM을 보내더니 이내 전화가 걸려온다.
“오랜만이야! 대단해. 어떻게 두 아이 기르면서 일을 그렇게 했어!!!
주변에 많은 사람 봐왔지만 네가 최고인 것 같아. 그리고 딸이랑 네가 찍은 사진 참 좋던데...”
“아들과 딸 중에서 누굴 더 사랑하니? 물론 똑같은 자식이지만...
아 그렇구나. 나이가 먹으면서 또 다를거야.”
“난 성남에 살다가 얼마전에 용인으로 이사왔어. 기흥”
“아 난 동생이 먼저 결혼했어.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같이 살고 있어.”
편하게 부탁해도 되는데 무슨 부탁이기에 그럴까...꽤 오랜만의 통화이고 오해가 시작되고 오해가 풀린 이후 첫 통화이니 바로 부탁하기는 어려웠던 걸까...편안한 수성과는 다르게 윤승의 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워낙 좋은 음성이지만 윤승의 초조함이 보이는 듯해서 수성은 본론을 꺼내주었다.
“부탁할 게 무엇인데 그래? 편하게 얘기해”
“아. 그게 그래도 오랜만인데 불쑥 연락해도 부탁하기도 미안하고...또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다름 아니고 아는 감독님이 몽골에 들어가는 홍보영상을 촬영하시는데
아나운서 같이 반듯하고 예쁜 친구를 추천해줄 수 있을까 해서...20대 초반의...”
“물론이지! 그게 뭐가 미안하고 어려운 부탁이라고~~~”
“아니 너도 방송하고 있고 그쪽에 활동하고 있는데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하기가 뭐해서...” “오빠! 나 30대 후반이야. 감히 20대 초반의 이미지를 탐할 시기는 지났지~”
“일을 하러 나온거야? 마음을 식히러 나온거야?”
“아 둘다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다독이는 게 먼저인데 마침 일할 것도 있고 해서”
“아 그럼 내가 가도 될까? 내비보니 15분 걸린다고 하는데!”
“나도 그 생각을 안한 건 아닌데 3,40분만에 들어가봐야할지도 몰라서 아까 말을 안꺼냈었어.
미안하잖아. 괜히”
“아냐. 너만 괜찮으면 일단 보자.”
"스타벅스 보정점이야. 누리에뜰에 주차하면 돼."
만나기로 하고 보니 아파서 누워있다가 그대로 나온 수성이었다. 예쁘게 보여야 할 관계는 아니지만 문자를 보내고 나니 이래도 괜찮나 싶었다. 다행히 윤승도 모자쓰고 청바지에 편하게 왔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곧장 주문을 하러 간다. 아마도 무언가를 사주고 싶었나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길래 주문하는 곳으로 다가가자 주차등록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진 머쓱해하는 윤승을 두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블루베리가 올려져 있는 치즈케익과 이름은 모르지만 달콤한 롤치즈케익을 들고 온다. 마주 앉고서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는 윤승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대로구나! 내가 네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 아니 네 이미지가 지금도 여전하구나.”
“내 이미지가 어땠는데? 더 예뻐지지 않았어?”라며 잘 하지 않는 농담으로 하하 웃는다.
“사실 굉장히 궁금한 게 많았어. 내가 아는 너는...아니다. 만나자마자 물어보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삶이 궁금했다고?”
“응...형욱이한테 듣긴 했지만...”
“하하 형욱이가 다 이야기했을 줄 알았는데 그 녀석이 말 안한 것도 있나보구나.
아니면 다 이야기를 해서 궁금한 건가?
그나저나 이 배우님 요즘 활약이 대단하시던데요. 언제부터 하고 싶었던 거야?”
라며 슬쩍 윤승의 이야기로 돌린다.
“아 사실 너희랑 스터디 할 때부터 마음은 그쪽에 있었어.”
“그랬어? 전혀 몰랐어. 다만 오빠가 갈팡질팡 무언가 마음이 떠 있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게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랄까...그냥 우리의 꿈에 대한 고민인줄 알았어.”
“응. 그 얘긴 형욱이에게만 했었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꿈을 좆아 지금 살고 있는데
일정한 수입은 없고 참 그렇다.”
“오빠가 정말 대단하네. 나는 말이야. 지금 오빠가 대단하다고 말했던 내 직업이 꿈은 아니었어.”
“맞다. 너 방송을 계속 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방송보다 강의가 체질에 맞더라고...
내가 리딩은 잘 못하지만 누군가가 그 리딩을 잘할 수 있게 변화시켜주는 재능이 있었어.
그래서 미련은 더 없는데 지금 일하고 있는 모습들이 내 재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인거고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난 작가가 되고 싶어.”
“작가? 어떤 작가?”
“음...그냥 소설도 쓰고 싶고 하늘, 풍경 담으며 연필로 느낌을 담기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이런 말 뭐하지만 꼭 써...언젠가 드라마나 영화될 것 같은 느낌이 딱 들어. 네가 쓴 글이라면!”
“그렇게 되는 게 소원이지만 그게 뭐 쉽나?”
“왜 각본 이런 것도 잘 쓸 것 같은데”
“아니야~그냥 내가 쓴 글이 모티브가 된다면 그걸로 족해.”
“그래. 꼭 쓰길 바라. 네 글이 기대된다.”
그런데 "수성아" 하며 입을 다시 떼는 윤승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래. 그랬었지...' 처음 만난 날부터 수성의 이미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던 윤승이었다. 물론 이성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같이 스터디했던 귀엽고 털털하지만 왠지 모르게 깍쟁이 같았던 태연이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 그 아픔에 형욱과 셋이 밤 늦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윤승의 죽마고우였던 따뜻하고 바르고 매너 좋은 혁 오빠와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했다.
"어쩌다가...결혼도 갑작스럽게 하고...아무튼..."
“아까 내가 딸을 더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딸에게 마음이 더 간다고...
첫 태동이었어. 애들아빠랑 심하게 다투고 울고 있는데 밤 12시에 처음으로 움직이더라고.
그 움직임이 단순한 발길질이 아니라 처음으로 말을 건넨 거였어. 위로의 말을...
'엄마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마음아파하지 마. 내가 위로해줄게'라며 두 시간을...
첫 태동을...첫 대화를 우린 그렇게 나누었어.
애들아빠를 선택한 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이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난 같은 결정을 했을 것 같아. 미혼모가 됐음 됐지, 딸을 포기하진 않아.
윤승오빠. 난 남편이 아니라 딸을 선택한 거야. 내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선택이기도 해.”
“그럼 너의 두 아이 말고 큰 아이는 몇 살이야? 아, 중학교 2학년...시어머님도 같이 사시고?
그 분은 널 도대체 어떻게 만난거니...업고 사시기는 하니.”
“아니, 바라지도 않아."
“넌 늘 그랬겠지. 좋지 않은 상황이어도 어떻게든 좋게 풀어보려고 혼자 이리저리 해보고 그렇게 했는데 안되면 끙끙거리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고...아마 화가 나는 상황이 와도 바르게 이성적으로 좋게 이야기했겠지.”
“그런데도 생각없고 개념없는 년이라는데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나아지긴 하더라...세월이 지나면...우리 부모님을 봐온 내가 알아.
이제 서른 여덟이나 됐으니 조금은 편해졌지만 난 그 고통을 늘 안고 살았어.
그런데 나이드시니까 아버지가 나아지시더라고...”
“응...그 사람도 나아지고는 있지.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이 나아졌다고 하는 그 시간엔
내 에너지가 더는 없을 것 같아.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더는 그 사람에게 쏟을 에너지가 나는 없어.”
“수성아. 아무리 상대가 통하지 않더라도 네 목소리는 내야 해.
현명하게 이별하더라도 그 전까진 네 목소리를 절대 삼켜서는 안 돼!
점점 더 네 목소리를 내야 해.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보다 너와 남아있는 네 삶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