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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Sep 01. 2022

반지하에서도 꿈은 빛나고 있다

"안녕하세요? 반지하 출신입니다."

  어느새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을은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들이 있었는데, 계절은 이미 그때를 잊은 듯했다. 그날의 뉴스에선 역대급 집중호우로 수도권 지역의 피해 상황을 연일 보도했었다. 나는 퇴근길에 장대 우산 속으로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무심히 비 피해 상황을 알려주는 인터넷 속보 기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지하 주택에서 침수로 일가족이 참변을 당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 애도의 댓글이  넘쳤다. 나는 가슴이 더욱 쓰렸다. 왜 이런 재난은 취약층에 훨씬 가혹한가? 그들에게도 분명 행복이 있었고, 꿈이 있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이 그러했듯.


  우리 부모님은 천안이 개발되기 전 소정리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라, 동네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결혼하셨다. 이미 결혼하기 전 엄마의 뱃속엔 내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가진 게 없었다. 아빠는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갔다. 엄마 나를 낳고 시댁에서 몇 달간 머무르시다 나를 친할머니에게 맡기고 아빠를 찾아가셨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명절에 고향에 오신 부모님께 서는 엄마 바짓 가락을 잡고 울고 있는 나를 가여워하여 함께 서울로 데려가셨다. 보금자리가 애를 키우기에 마땅치 않아 주저하셨지만, 어떻게든 세 식구 살아가지 못할까? 그렇게 혹독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우리 가족은 반지하 주택서 살았다. 내 기억이 그나마 생생한 초등학교 시절에도 우리 가족은 반지하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가 벌리고 있던 사업은 IMF를 직격으로 맞으며 무너졌고, 우리 가족은 더 깊은 반지하로 옮겨 갔다. 반지하도 햇빛이 반쯤 드는 '앞 집'이 있고 더 안 쪽에 동굴과 같이 어두워 빛이 한 톨도 들지 않는 '뒷 집'이 있었다. 뒷 집이 우리 집이었고, 부모님은 빚을 갚기 위해 저녁까지 맞벌이를 하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혼자 그 어두컴컴하고 텅 빈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 학교가 끝나고도 집 앞 골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랑 동갑이던 여자애가 반지하 앞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지만 인사를 건네진 않았다. 부끄럽고 부러웠다.


  어렸을 적 밤에 잠이 든 나는 악몽을 자주 꿨다. 도둑이 허술한 우리 집 현관문을 따고 들어오는 꿈. 창문 쇠창살 사이로 다리가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쪼그려 앉은 아저씨가 창문 틈 사이로 자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꿈. 항상 여름 장마철에는 비가 벽을 타고 내려와 금방 곰팡이가 생겼다. 습하고 꿉꿉했다. 에어컨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부채와 선풍기로 끈적한 더위를 보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반지하 생활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께서 앞 집이 이사를 간다는 얘기를 하셨다. 건너편 주택에 2층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갑내기 여자애를 더욱 부러워했었다. 그 부러움은 나에게 꿈을 갖게 했다. 이 지독히도 어두운 반지하 생활을 벗어나는 꿈을. 그렇게 동굴 속에선 작은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다. 부모님처럼 살기 싫었다. 돈을 벌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번 돈으로 햇 볕이 잘 드는 그런 집에 살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 돈 때문에 잦은 다툼은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나름 화목했다. 작은 방에서 세 가족이 도란도란 모여 엄마가 뜯어주시는 옛날 통닭을 먹으며 꿈을 키웠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엔 내신성적으로는 상위권에 있었지만, 반지하는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님도 부단히 노력하셨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함부로 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수시 1차로 지원한 대학에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수능을 보지 않고도 입학이 가능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마음속 한편엔 등록금 걱정이 자리 잡았다. 다행히 아빠가 알아보니 정부에서 대출이 가능했다. 그렇게 대학 생활도 빚으로 시작하였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나 혼자 그 지긋지긋한 반지하 생활을 벗어났다. 기숙사는 비록 4인실이었지만 창문으로 햇 볕이 밝게 비추던 곳이었다. 나 먼저 반지하를 탈출한 미안함은 있었지만, 곧 부모님도 사정이 나아져 근방 주택의 2층으로 이사를 가셨다. 이사 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이삿집과 케케묵은 어린 시절 추억들을 옮겼다. 2층이지만 주변에 다른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뻥 뚫린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땀을 흘리며 무거운 이삿집을 옮기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의 작은 꿈이 이뤄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더 흘러 어느덧 나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이젠 과거 17년 간의 반지하 생활도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다. 비록 전세지만 경기도 신도시 아파트에 살다 보니, 주변에 반지하 주택을 보지 못한 것도  한 몫했다. 부모님도 그 이후로는 반지하로 돌아가지 않으셨다. 회사 퇴근길에 본 반지하 침수로 인한 일가족 참변은 다시금 나에게 그 과거의 반지하 추억을 되새기게 했다. 추억이랄 것도 없지만, 어두컴컴한 동굴이었던 반지하 방에서 우리 가족이 도란도란 모여, 탈출을 꿈꾸던 그 희망찬 다짐들이 지금의 나에겐 작은 꿈을 이룬 과정이었다. 돌아가신 가족분들에게도 그런 꿈과 희망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라도 그렇게 원하던 빛을 맘껏 끌어안아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지금도 반지하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꿈을 갖고 버텨내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볼 거라고, 그 빛은 어둠을 추억으로 만들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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