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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Aug 14. 2023

36개월이 지나니 육아가 수월해진 것을 느낀다

"이젠 정말 사람 되었다!"

  오늘은 태풍 눈이 한반도를 관통하며 무섭게 올라오고 있다고 하여 재택근무를 신청한 날이다. 재택근무는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코로나가 창궐해서 크게 유행이 돌던 시기에 수시로 재택근무를 활용했었다. 그때는 아이가 워낙 어렸던 때라 재택근무를 해도 아이를 눈에 넣느라 바빴다. 당연히 일처리는 뒷전이었고, 재택근무를 하며 억지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고 하니 이도 저도 못하고 나만 지칠 따름이었다. 아이는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아빠를 찾았다. 업무 전화가 와도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죄송하다는 말부터 시작했고, 문자와 메일로 전달해 주길 부탁한다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심엔 이의 밥을 챙겨 먹이느라 나는 대강 때우기 일쑤였다.


  우리 딸아이는 20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린이집을 다녔다. 로나 방역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어린이집을 보내는 기간에도 어김없이 수시로 재택근무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어린이집을 보내니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중해서 업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오후 4시에 딱 끝나는 게 아니라서 4시 이후에 오는 업무와 연락을 대응하는 것은 이전과 같이 쉽지는 않았다. 하원하고 오면 아이가 오히려 나에게 더 보채는 느낌이 들어 힘겹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기관 생활을 한다는 게 미안하기도 해서 집에서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수시로 아이에게 신경이 쓰였다. 맞벌이의 비애는 재택근무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오늘 재택근무는 상당히 오랜만에 하는 것이라 약간 어색할 정도였다. 장모님께는 미리 오늘 안 오셔도 된다고 당당히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이전에 많이 겪은 일이라서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늘 내가 재택근무라는 것을 아는 것인지 아침 7시 반에 핸드폰 알람처럼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아빠 일어나! 나 배고파!"


자기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대견스럽기도 다. 무거운 몸을 벌떡 일으켜 아이의 아침을 준비했다. 메뉴는 어제 아내가 삶아 놓은 계란과 우유에 불린 오트밀이다. 간식으로는 딸기잼을 바른 빵을 준비했다. 우리 집은 아침을 간단히 먹는 편이고, 아이도 이에 적응한 듯했다. 그래도 크게 병치레를 하지 않고 무척이나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고마울 뿐이다. 아이가 아침을 먹고 있으니 아내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평소에 나는 이 시간엔 회사에 가 있으니, 오랜만에 보는 우리 집 아침 풍경이 조금은 낯선 느낌이었다. 아침을 잘 먹지 않는 아내는 삶은 계란만 한 개 입에 욱여넣고 바쁜 출근길을 서둘러 재촉했다. 나는 오랜만에 아이의 등원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스스로 준비하는 아이의 모습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치도, 세수도, 옷도 스스로 입는 것이었다. 머리 묶을 때도 가만히 앉아 기다렸고, 친구 선물 준다고 지난밤 열심히 접은 색종이 개구리도 어린이집 가방에 챙겨 넣었다. 너무나 순조롭게 협조해 주어 아직 등원시간 전인데도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어린이집 가는 길. 아이가 빨리 준비해 준 덕분에 여유롭게 걸어갈 수 있었다. 집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길이지만 태풍이 다가오고 있어 약간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알아서 잘 쓰고 내 앞에 서서 어린이집까지 자기 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아이가 이젠 정말 사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등원시킨 후 집으로 돌아와 업무를 보았다. 예전 같으면 등원하는 것부터 지쳐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저 편안히 집중하여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오히려 회사에 출근하는 것보다 능률이 더 아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점심은 간단히 라면을 끓여 먹고 휴식을 취했다. 오후 일과를 보는 와중에 보통 3시가 넘어가면 예전에는 부담감이 몰려왔는데, 오늘만큼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늘 재택근무의 퇴근 시간을 네시 반으로 맞춰 놓았기 때문에 하원하고서도 충분히 아이와 놀아줄 수 있을 터였다. 대신 아이가 예전보다 30분은 더 어린이집에 있어야 했는데, 어린이집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드디어 하원 시간. 네시 반에 업무를 종료하고 어린이집 앞으로 가 벨을 눌렀다. 얼마 안 되어 아이가 선생님 손을 잡고 나왔다.


"아빠다!"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신나 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가 어린이집을 나오자마자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근데... 하은이는?"


나는 익히 아내와 장모님을 통해 하은이라는 친구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같은 어린이집은 아니지만, 함께 놀이터에서 놀며 친해진 친구라고 했다. 가끔씩 아이 어린이집 앞으로 와서 기다렸다가 아이가 나오면 함께 놀이터에서 놀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이가 오늘은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아 약간은 아쉬워하는 듯이 어린이집 주변을 배회하였다. 그러다 포기하고 놀이터에 갔는데, 갑자기 아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하은이다!"


아이의 손가락 끝을 보니, 한 아이가 놀이터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그 아주머니가 우리 아이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도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자주 보는 분인 듯했다. 나도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벤치 옆자리에 앉았고, 아주머니는 익숙한 듯 우리 딸에게 간식을 건네주었다.


"똥이야, 맛있게 먹어. 오늘은 아빠랑 같이 왔네!"


간식을 다 먹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이터로 뛰어나가 신나게 놀았다. 아이와 오랜만에 평일에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주려던 참이었는데, 알이서 잘 노니까 약간 김이 샌 느낌이 들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것을 눈으로 좇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친구에게 관심이 생겨 옆에 계신 아주머니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아이들끼리 원래 저렇게 잘 놀았어요?"

"하은이 봐주시는 선생님이시죠? 얘기는 들었어요"

"보통 몇 시까지 놀이터에 계세요?"


얘기를 나누며 아주머니는 나에 대해서도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함께 놀기에 장모님과 아내에게 전해 들었던 것이다. 특히나 장모님은 같은 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더욱 친하게 지내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아이가 친구가 생기니, 나의 관계도 더욱 확장되는 것 같았다. 태풍이 이미 지나간 것인지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시간가량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노는 것을 나는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친구가 생겨서 편한 것 같긴 한데, 뭔가 허전한 느낌은 너무 내가 오버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내가 퇴근을 해서 저녁 6시 반에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놀이터에서 실컷 놀아서 땀에 절은  아이를 목욕시키고, 아이와 함께 잠시 쉬고 있었다. 아내가 불금이니 근처 치킨집에서 외식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아이에게 의사를 물었다.


"엄마가 밖에서 밥 먹자는 데 같이 갈까?"


아이는 솔깃해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 엄마 데리러 가자!"


아이가 벌써 엄마를 챙기려는 모습에 감동이 몰려왔다. 아내가 올 시간에 맞춰 아이와 함께 아내의 퇴근길 중간으로 나갔다. 아이는 엄마를 보며 반가워했고, 우리 셋은 함께 치킨집으로 갔다. 저녁 외식으로 이 치킨집을 선택한 건 아이에게 줄 주먹밥도 팔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 국민 메뉴인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치킨과 함께 주먹밥을 시켰다. 당연히 아내와 난 맥주 500cc도 함께 했다. 아이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문을 해놓고, 옆 편의점으로 가 뽀로로 음료수를 하나 사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맥주잔 두 개와 뽀로로 음료병 하나를 맞부딪치며 '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뜨거운 치킨을 주먹밥과 함께 잘 먹어주는 아이가 대견스러웠다. 심지어 양념이 살짝 묻은 치킨도 아이가 "먹을 수 있어!" 라며 자랑스레 씹어 먹었다. 맵지 않냐고 재차 물어도 아이는 살짝 눈물을 글썽이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뽀로로 음료수를 연신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아내와 나는 목젖을 젖히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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