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똥이애비 Sep 27. 2022

육아는 분노와의 싸움이다

"육아는 여유롭고 느긋하게..."

  나는 지금 세 살 딸아이를 키우는 중이다. 정확히는 26개월이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6개월 동안 나는 솔직히 아이에게 분노한 적이 꽤 많다. 아이를 낳기 전에 아내에게 다짐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친구 같은 좋은 아빠가 될 거야." 하지만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돌아섰을 때 항상 죄책감과 후회가 몰려왔다. '좀만 더 참을걸...' 이러다가는 좋은 친구는커녕 나중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빠는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눈에 아른거렸다. 이렇게 아이에게 화를 내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여러 권의 분노 관련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아이에게 특별히 분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에겐 굉장히 좋은 본보기였다. 아이가 아무리 떼를 써도 차근차근하게 타이르고, 절대 화를 내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대할 때뿐만 아니라 부부 생활 속에서도 아내는 나에게 분노한 적이 별로 없다. 어떻게 화를 그렇게 잘 참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아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상황이 와도 그렇게 분노가 끓어오르지 않아" 아내의 대답이었다. 기질적인 차이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스스로 화를 제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글을 통해 아내와 분노를 다루는 방식 차이를 정리해보고, 내가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상황 : 방이 심하게 어질러져 있을 때

  나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거나 간식을 먹일 때 흘리는 것을 바로바로 치우면서 먹인다. 최대한 바닥에 흘리지 않도록 턱받이를 하는 건 물론이고, 아이 바로 옆에서 밀착 케어를 한다. 그러다 아이가 자꾸 반복적으로 흘리면 화가 난다. 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블록 쌓기를 하다가 갑자기 색칠 놀이를 하겠다고 하면, 나는 블록을 정리하고 다른 놀이를 하자고 아이에게 제안한다. 색칠 놀이를 하다가 방방이를 뛰러 간다고 하면, 색연필을 정리하고 가자고 말한다. 이렇게 나는 아이를 케어하는 동시에 집 안을 정리하여, 심하게 어질러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러다 아이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이탈하면, 속으로 부글부글 하면서 혼자 정리를 한다. 하지만 아내는 반대다. 아이가 바닥에 밥 한 공기를 다 흘려도 아무렇지 않다. 다 먹고 나서 한꺼번에 정리하면 된다고 말한다. 놀이도 이거 했다 저거 하면, 이거 한 것을 정리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가 다른 거 놀다가 와서 또 만지기 때문에 굳이 바로 정리할 필요가 없단다. 그러나 아이가 한두 시간만 노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 집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는 집 안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가끔씩 퇴근하고 오면 이렇게나 집안을 난리 난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아서 아내와 아이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아내는 억울해했다. 아이에게 집중하는 게 우선이고, 집안은 나중에 아이가 자거나 씻으러 갈 때 한꺼번에 정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이 키우는 집안은 원래 이렇고 평소에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여기서 아내와 나의 첫 번째 분노를 다루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나는 '집은 항상 깨끗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아이가 그 관념을 자꾸만 깼을 때 화로 분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것에는 관대했다. 오히려 '아이는 원래 어지르는 사람'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기에 아무리 어질러도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좀 더 내려놓고 내 생각을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두 번째 상황 : 아이가 심하게 떼를 쓸 때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는 항상 떼를 쓰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된다. 최근 들어 떼쓰는 경향이 좀 심해졌는데 그건 아이에게 자아가 생기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안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직 세 살이지만, 미운 네 살이 오면 아이의 떼쓰기는 절정을 달한다고 하니 벌써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몇 주전 아이가 저녁에 자기 전 목욕을 할 때의 일이다. 아이가 갑자기 씻기 싫다고 바닥에 드러누우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늦여름이라 놀이터에서 놀다가 땀도 많이 흘렸고, 냄새도 나고 있었기에 무조건 목욕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떼를 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얼마 전 내가 머리를 감겨주다가 거품이 눈에 들어가서 따가웠던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아이는 목욕할 때마다 떼를 쓰면서 눈을 가리킨다. '그때 아빠가 아프게 한 것 때문에 또 그럴까 봐 겁이 나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것은 해야 하기에 울더라도 억지로 끌고 가서 빨리 씻기려고 했다. 그런 면에선 좀 엄격한 편이었다. 아이가 자지러지기 시작하고, 나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화를 내면서 거친 손으로 아이를 목욕시켰다. 아이는 목욕 시간 내내 울었다. 다음 날 아내는 똑같은 목욕 시간에 다른 방식을 취했다. 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이리 달래고 저리 달래며 욕실까지 스스로 자기 발로 가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거품이 무섭다고 하니, 머리를 감을 때 물로만 헹구겠다고 아이에게 약속하였다. 아이는 말은 잘 못하지만 말귀는 어느 정도 다 알아듣기에, 이에 수긍하고 있는 듯했다. 내 생각에는 머리를 감을 때 당연히 거품을 내고 감아야 가렵지 않고 개운 할 텐데, 아내에겐 해야 할 일보다는 아이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우선이었다. 그날의 목욕은 아이의 웃음소리와 함께였다. 여기서 두 번째 깨달음이 있다. 해야 할 일을 꼭 해야 한다는 나의 강박은 자기 요구에 가까웠고 이를 아이에게 전가함으로써 아이도 나처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세 살 아이에게 말이다. 아내는 아이가 싫다고 강하게 거부하면 '꼭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음에 좀 괜찮아지면 또 시도해보자'라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점차 전달되어서 나만의 강박을 스스로 내려놓게 만들고 있다. 좀 더 나에게 관대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만 가족에게도 안정적인 심리 상태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야만 외부 자극에서 얻은 부정적인 감정을 내 안에서 스스로 허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 번째 상황 : 어린이집 등원이 늦었을 때

  나는 아이가 일어나서 9시까지 어린이집에 등원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렇다면 9시를 기준으로 거꾸로 시간 계산을 한다. 8시에 기상, 8시 30분까지 아침으로 준비한 계란과 오트밀을 먹고, 8시 40분까지 양치와 세수를 하고, 8시 55분까지 옷을 입고 머리를 묶으면 집에서 5분 거리인 어린이집까지 딱 9시에 도착하겠다. 하지만 처음에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부터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다행히 8시 전에 일어나면 좀 더 여유롭게 준비해도 되는데, 8시 넘어서까지 늦잠을 자면 점점 초조해진다. '이러다가 늦는 거 아니야?' 아이를 깨워볼까도 고민해본다. 8시 15분이 넘어가면 슬슬 옆에서 아이의 몸을 살짝 흔든다. 아빠가 억지로 깨운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일어난 것처럼 하려는 수작이다. 아이가 뒤척이다 눈을 뜨면, 아침 먹자고 꼬시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를 닮아 먹는 거에는 약해서 금방 따라와 준다. 하지만 양치하기 싫다, 이 옷 입기 싫다, 머리 묶기 싫다, 머리핀으로 바꿔달라고 할 때마다 내가 생각한 시간보다 점차 늦어지고 초조함을 느끼면 아이를 보채기 시작한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잠깐이라도 아이가 떼를 쓰면 결국 화를 내게 된다. 아내는 그렇지 않다. 아이가 충분히 자고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않는다. 만약 늦게 일어났다면 준비한 밥을 먹이지 않고, 어린이집 가는 길에 먹을 수 있는 빵과 두유로 대체한다. 머리 묶기 싫다고 하면 푼 채로 등원을 시킨다. 등원 시간도 9시를 딱 맞추지 않는다. 9시 10~30분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이렇게 시간관리에 대해서도 차이가 발생하는데, 아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아니, 회사 생활도 아니고 고작 아이 어린이집 보내는 건데 좀 늦으면 어때? 9시에 보내든 10시에 보내든 가기만 하면 다행인 거지." 그렇다. 나는 사소한 것에도 시간에 목이 메어서 아이의 기분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와의 시간 약속이 아이의 관계보다도 더 중요시 생각했던 것이었다. 시간관리를 효율적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상황에 따라 다르다. 회사에선 환영받을 일이지만, 가정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가족과의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시간에 집착하는 습관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하겠다.


  지금까지 아내와 나의 육아 방식의 차이점을 통해서 나는 왜 아내보다 똑같은 상황에서 더욱 분노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정리해보면, 나는 아내보다 완벽주의와 본인에게 엄격한 자기 요구가 기질적으로 높은 상태였다. 스스로만 그러면 되는데 이를 고작 세 살 아이에게도 동시에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를 해내지 못하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가정에서는 좀 더 많이 내려놓아야 했다. 좀 늦으면 어떻고, 좀 어질러지면 어떻고, 좀 안 하면 어떠할까. 아이가 행복하게 웃으면 그걸로 나는 족한 것이다. 나는 더욱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존중하며, 포용적인 사람이 되어서, 마음이 여유롭고 느긋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가 더 신난 운동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