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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Nov 07. 2023

아빠가 더 신난 운동회

"그래도 너도 재미있었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직접 만든 초대장을 들고 왔다. 토요일 10시에 실내 체육관에서 운동회가 개최될 예정이라고 했다. 사실 몇 주전에 야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가 오는 바람에 급하게 취소되었었다. 그때는 아쉬운 마음뿐이었는데, 다시금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육아를 하고 처음 하는 운동회라 기대도 컸다. 아이에게 아빠가 이기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운동회 이틀 전엔 회사 헬스장에서 전신 근력 운동을 한 시간 정도 했다. 너무 무리하면 운동회 당일 알이 배길 수도 있으니, 근육을 깨우는 정도로만 자극을 주었다. 운동회 전날엔 가족 모두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다음 날 컨디션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운동회 당일. 분주히 움직여서 제시간에 맞춰 운동회가 열리는 체육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이미 돗자리를 깔고 체육관에 쭉 둘러앉아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는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청 팀과 홍 팀으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는 홍 팀이 되었다. 딸의 같은 반 친구 가족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 옆 자리에 우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같은 반 친구들 부모와는 따로 몇 번 인사를 나누곤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모든 가족이 다 함께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본 아빠들끼리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ㅇㅇ아빠입니다."

"지난번에 엄마들끼리만 보고 저흰 못 봤죠?"

"날 한 번 잡아서 아빠들끼리도 뭉칩시다!"


  10시가 넘어가자 체육 선생님들 네 분께서 운동회 행사의 시작을 알리셨다. 개회식을 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였는데, 학창 시절 이후 오랜만에 하는 거라 감회가 새로웠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왕년에는 운동회를 하면 날아다니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학부모로서 참석하지만 그래도 내 역할은 충분히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편에 쌓여있는 수많은 상품들 중 하나라도 받지 못하면, 분명 아이는 울면서 집에 갈 것이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했다.


  처음엔 스트레칭 겸 댄스타임이 있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엄마들이 소싯적 클럽에 다니던 솜씨를 뽐내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그나마 재미있었다. 단체 줄넘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편을 가르고 경쟁을 하니 모두들 승부욕이 발동하여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외에도 다양한 단체 종목이 준비되어 있었다. 공 굴리기, 탑 쌓기, 단체 달리기, 콘 세우기 등등. 종목을 거듭할수록 아이들보다 엄마, 아빠들이 지지 않으려 더 열심히 했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 또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는데, 곧바로 아빠가 엄마를 업고 오래 버티는 이벤트 경기가 있었다. 오랜만에 아내를 업었더니 예전엔 경험해보지 못한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가 살이 찐 건지, 내가 체력이 저하된 건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아빠들 표정이 다 죽어가는 듯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을 것이었다. 대 여섯 팀 정도가 남아있을 때쯤 진행하시던 체육 선생님이 아빠들의 건강이 염려된다며 가위바위보로 1등을 정하자고 하셨다. 나를 포함한 남은 아빠들은 모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턱 끝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운동회의 꽃인 줄다리기와 이어달리기만 남았다. 먼저 아이들의 줄다리기가 있었지만, 누가 이겼는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어서 엄마들의 줄다리기도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남자들의 자존심을 건 아빠들의 줄다리기만을 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직 시작도 안 했는데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줄이 더욱 팽팽해지는 만큼 긴장감도 덩달아 올라갔다. 같은 팀의 나이가 좀 있으신 아빠가 뒤로 이 말을 전달하라고 했다.


"시작하면 줄을 일단 겨드랑이에 끼고, 구령에 맞춰서 하나 하면 당기는 겁니다."


마치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팀은 그의 말을 따랐고 시작하자마자 압도적으로 상대 팀의 줄을 끌고 왔다. 질질 끌려오는 상대 팀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고 잠시 희열을 느꼈다. 순식간에 경기가 끝나버렸고, 난 자신감 있는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았지만 아이는 친구들과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마지막 경기인 이어달리기도 순서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먼저 뛰고, 엄마들이 뛰었다. 실내 체육관이라서 바닥이 미끄러웠는지 의욕이 넘친 엄마들이 코너에서 자주 넘어졌다. 넘어지지만 않으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아빠들 경기. 난 역시 이어달리기도 계주 선수로 참여했다. 게다가 1번 주자로 뛰기로 했다. 1번 주자에서 승기를 잡으면 마지막까지 이길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운동화 끈을 다시 질끈 묶으며, 꼭 승기를 잡아 다음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준비, 땅. 바깥쪽에서 시작한 나는 재빨리 앞서나가 안쪽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앞에서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너를 돌아갈 때 운동화 바닥이 쓸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주변에서 탄식의 소리가 들려왔고, 그중 아내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민망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일어나 바통을 다시 줍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바통을 다음주자에게 넘겨주고 나서야 비로소 팔꿈치가 까진 걸 알게 되었다. 쓰라린 팔꿈치를 부여잡으며 다른 아빠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세, 네 번째 우리 팀 아빠들이 전력을 다해 뛰며 상대 팀 아빠를 더니 마지막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지기라도 하면 가장 큰 원망은 나에게로 넘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팀의 마지막 주자가 먼저 들어오며 승리를 지켜내었다. 우리 팀 계주 주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하이파이브를 연신 날렸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체육대회를 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어린이집 운동회는 비로소 아빠들의 축제가 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 모여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다.



  12시 반이 넘어가는 시각. 폐회식까지 마친 뒤에야  다행히 상품을 두 개나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아이가 아무런 투정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어린이집 가족들이 모두 모여 기념촬영을 했고, 운동회를 기획하고 운영하신 선생님들과 감사 인사를 나누었다. 운동회 행사동안 홍 팀으로 함께한 가족들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며, 다음을 기약했다. 아빠로서 처음 참여한 아이 운동회였지만, 뒤늦게 나 혼자 너무 추억에 빠져 즐긴 게 아닌가 하는 민망함이 들었다. 표정을 보니 다른 아빠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짐을 정리하고 집에 가려는데, 우리 아이의 친한 친구 아빠가 약속이 없으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렇게 운동회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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