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의 마무리, 회사 송년회에서 보람찬 한 잔
"연말에 받은 뜻밖의 따뜻한 선물"
진짜 연말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시간이 총알처럼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은 서른 후반의 나이로 달려가고 있는 나만의 착각인 것인지, 아니면 원래 시간이란 게 의식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연말이 다가왔으니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송년회가 하나, 둘씩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서도 실 전체 송년회를 하게 되었다. 회사 회식은 역시나 고깃집이다. 올해 마지막 회식이라 그런지 총무는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모두 먹을 수 있는 장소로 예약을 해놨다. 우리 실 인원 23명이 딱 꽉 차게 앉을 수 있는 방에서 가운데 임원자리를 기준으로 은근한 눈치싸움을 하며 더 먼 곳으로 하나, 둘 씩 자리를 선점했다. 나도 살짝 편승하여 편하게 고기와 술을 먹을 수 있는 자리에 발 빠르게 앉았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우며, 맥주를 한잔씩 따랐다. 그리고는 서로 짠을 하며, 한 마디씩 덕담을 주고받았다.
"올 한 해도 고생 많으셨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보통 이런 류의 형식적인 말들이 오가며 회식 자리가 시작된다. 일단 주린 배를 어느 정도 채우고 자유로운 얘기들이 오가기 시작하면, 사회자를 자처하는 총무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을 한 명씩 올려 세운다. 리더들이 건배사를 하며 하는 말들은 보통 이런 식이다.
"여러분, 잔을 채워주세요. 덕분에 올해도 좋은 성과가 나왔습니다.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하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고기를 굽고 얘기를 나누느라 그리 귀 기울여 듣지는 못한다. 한 십 년간 비슷한 얘기들을 듣다 보면, 어차피 예상 가능한 말들이라 듣는 척만 할 뿐이다. 나는 형식적인 건배사에 잔을 가득 채운 소주를 연신 들이켤 뿐이다.
연말 송년회는 다른 날들의 회식과는 달리 조금 특별하다.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이들도 한 잔은 마시는 날이고, 술을 몇 잔 못 마시는 이들도 한 병은 마시는 날이고, 주량이 두 병정도로 평균 이상의 주량을 과시하는 이들도 과음으로 만취하는 날이다. 그만큼 연말의 회포가 모든 이들을 취하게 만든다. 더욱이 연말 송년회의 특별함을 빛내주는 일들은 인사고과에 관한 은밀한 대화들이다. 보름정도만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들을 취한 리더들에게서 미리 듣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그게 당사자에게 재미로 다가왔을 때만 그렇고,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다. 진급 누락이나 낮은 고과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경우 당사자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집에 가버리는 일도 발생한다.
1차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을 때쯤 거나하게 취한 팀장이 비어있는 내 옆자리로 와 앉았다.
"아, 우리 조 과장~ 일 년 동안 고생 많았어!"
"팀장님도 올 한 해 수고하셨습니다."
서로 꽤나 마셨는데도 이런 형식적인 말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팀장이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 과장, 축하해! 내가 힘 좀 썼어."
회사생활이 십 년이 넘어가면 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 역시 눈치를 채고는 팀장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에 연말이 따뜻하겠네요. 하하하."
팀장과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진하게 한 잔씩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일 년 간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했다. 내년에도 서로 파이팅 하자는 의지를 다지는 말로 1차를 마무리했다.
연말 송년회가 1차로만 마무리된다면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당연히 총무는 2차까지 계획을 하고 있었고, 취한 무리들을 이끌고 예약된 맥줏집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같은 팀 후배 한 명이 기분 좋게 취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과장님, 팀장님이 좋은 소식 들려주셨나요?"
"어? 들었어? 하하. 이번에 좋은 고과 기대해 봐도 될 것 같더라."
"저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승진 결정 됐대요. 이제 저도 과장입니다. 하하."
"오, 그래? 팀장님이 그건 나한텐 말 안 해주시던데... 어쨌든 축하해! 김 과장! 하하하."
"아, 벌써요? 하하하. 기분 좋네요!"
"얼렁 들어가서 둘이서 한 잔 하자고! 하하."
이렇게 난 2차를 기분 좋고 보람차게 시작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은 조금 과음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에 연신 짠을 해댔다. 2차는 대부분 많이 취해있기 때문에 화합의 장이 된다. 모두가 형이고 누나고 친구고 동생이 된다. 회사에서 평소에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선배들 마저 누구보다 친해진다. 술의 힘이 놀라운 이유다. 내일이면 다시 원상 복구될 테지만, 오늘만큼은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서로의 오해를 잘 풀어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차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쯤 선배들이 따르는 술에 만취된 신입사원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엉엉."
옆자리에 있던 선배들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위로의 말을 하나씩 건네었다.
"신입사원 때는 원래 한 번씩 울어. 그래도 오래 잘 버텼네. 3개월 만에 운 거잖아. 오늘 펑펑 울고 내일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돼."
"맞아, 여기 있는 선배들 회사에서 안 운 사람 없어."
"나는 과장 때도 울었어, 괜찮아. 별 거 아냐."
내일 기억이 난다면 이 신입사원은 눈을 뜨자마자 이불킥(?)을 할 것이다. 그를 통해 내 신입사원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니, 술을 마시지 않고도 밤 11시에 야근을 하며 사무실 자리에서 울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리 힘들었던지. 그렇게 십 년이 지난 나는 더욱 단단해져 있고, 오늘도 기분 좋은 소식을 들으며 연말을 마무리하고 있다. 분명 그에게도 회사생활을 통해 보람찬 한 잔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신입사원이 회사생활하며 우는 것은 그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선배들은 모두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난 대리운전을 불러 술에 만취한 팀장을 겨우 태워 보냈다. 평소였으면 속으로 '적당히 좀 먹지, 으휴!' 하며 욕을 해댔겠지만, 오늘은 나에게 따뜻한 선물을 안겨준 만큼 기분 좋게 집으로 보내드렸다. 나머지 만취한 인원들은 집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고, 3차로 노래방에 간 인원들도 있었다. 후배 한 명이 노래방에 오라고 연신 전화를 해댔지만, 팀장을 태워 보낸 뒤에 나 또한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오늘은 집에 도착하면 아내와 아이가 깨어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조금 서두른다면 11시 안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편의점에 들러 아내와 마실 맥주와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아내에게는 미리 연락을 해 놓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문득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하신 아버지가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우시며 시장에서 사 온 통닭을 먹이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잠시 눈을 감고 그때의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그땐 엉겁결에 일어나서도 참 맛있게 먹었었는데... 아버지도 그땐 지금의 나와 같은 행복한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고되고 힘든 하루였을까. 통닭에 집중하느라 아버지 표정을 살피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아버지와 통화라도 한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취기에 버스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