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들려온 소식은 아내의 외삼촌이 투병 생활 끝에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8년 전 결혼식 때 잠깐 뵜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몇 년 전 건너서 듣기로는 치매가 있어서 요양 생활을 한다고 하셨는데, 결국엔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이 수도권이라 퇴근하고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곧장 갈 수 있었다. 이미 장모님과 아내의 외가 쪽 식구들이 대부분 와 있었다. 외삼촌에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는데 모두 40대가 넘었고, 우리가 도착해서 인사를 드리자 슬픈 와중에도 반겨주셨다. 고인에게 예를 표하고 음식이 준비된 테이블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 침체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70세가 조금 넘은 나이에 일찍이 돌아가셨지만, 워낙 병세가 오래되어 모두들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좋은 소식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 온 딸아이는 조금 더 큰 친척 오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장례식장에 퍼져나갔고,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나마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나는 아이에게 여기선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훈계하였지만, 다섯 살 난 아이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스러운 표정만 할 뿐이었다. 퇴근하고 곧장 온 우리 가족은 차려진 식사로 배를 채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례식장 음식은 오랜만이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예상치도 못한 채로 맛있게 먹었다. 아이가 잘 시간이 가까워 와서 오래 앉아있지는 못하고, 더 놀려고 하는 아이를 말리며 친척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며칠 뒤, 토요일에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고 있던 와중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셋째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 소식이었다. 오래전 사고로 다리에 문제가 있어 절름발 장애가 있으셨고, 그 이후로 일을 하지 못해서 이모가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오고 계셨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나보다 한 살이 많아 어렸을 땐 자주 함께 놀았었다. 이모부는 자주 못 뵈었지만, 이모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 함께 자주 만나와서 근황을 나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모부의 건강 소식을 들었었고크게 나빠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에 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다음날 낮에 우리 가족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 부모님은 먼저 와계셨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형과 인사를 나누고, 이모를 위로해 주었다. 사실 오는 길에 어머니로부터 이모부가 갑작스레 사망하게 된 사유를 알게 되었다. 자살이었다. 경찰이 조사한 결과로는 생활고 비관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이라고 들었다. 어렸을 때 함께 낚시하던 이모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거의 보지 못해 나에게 이모부는 그때 그 얼굴로만 남아있다. 어쩌다 삶을 스스로 마감하셨을지 그 깊은 내면까지는 내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뿐이었다.
그 후 일주일이 좀 지나고 나서는 회사 같은 팀 부장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었는데, 그게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부장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부모님 치매 보험 들어놓으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났다. 간병비가 꽤나 많이 든다고 말씀하셨었다. 부고에서 본 부장님의 어머니 연세는 90이 넘으셨다. 연세가 있어 치매라는 퇴행성 뇌질환이 심해지신 듯했다. 나는 마침 장례식장이 회사 근처라 팀 사람들과 함께 점심에 장례식장을 들렀다. 거기서 본 부장님의 얼굴을 평소 자신만만하던 표정과 달리 안쓰럽고 초췌했다. 위로의 말을 전하고 팀 동료들과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회사에서 복지로 경조사 지원이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료들과 회사 조사 지원 제도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이 제도를 써보지 않았던 나는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이 조사 지원제도를 이용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며, 부모님의 연세를 가늠해 보았다. 부모님이 80세에 돌아가신다고 하더라도 회사를 15년 이상을 더 다녀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이 회사에서의 조사 지원 제도를 굳이 알아둘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부모님이 오래 사셨으면 했다.
지난 주말 초등학교 동창 친구로부터 아버지 부고를 전해 받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71세셨고,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날로 다른 동창 친구에게 연락하여 저녁에 만나 장례식장에 함께 가기로 했다. 사실 아버지를 여읜 친구와는 최근 연락이 뜸했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 이십 대 후반까지는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었는데, 내가 결혼을 한 뒤 서로 먹고사는 길이 너무나 달라 연락을 주저했었다.수도권에 장례식장이 차려져 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에 갔다. 함께 가기로 한 동창에게도 대중교통을 타고 오라고 말했다. 이번 장례식장에선 왠지 술을 한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친구를 만나 함께 들어갔다. 우린 아버지를 여읜 친구를 만나 위로를 건넸다. 친구는 많이 슬퍼 보인다기보단 담담해 보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 후 음식이 차려진 곳을 가서 자리를 잡았다. 셋이서 소주를 한잔 기울였다. 친구는 아버지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 아빠가 이놈의 술을 좋아해서 간이 완전히 상하셨어. 그게 나 어렸을 때부터였으니까... 꽤 오래되었지. 간경화가 좀 있으셨는데... 그게 금방 간암으로 변하더라고. 나도 아빠 술 마시는 거 보고 진짜 싫어서 술을 안 먹기로 했는데... 또 이렇게 마시게 되네, 참."
친구의 얘기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유를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얘기를 듣던 우리는 각자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친구는 덧붙여 말했다.
"아빠가 아무리 미워도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들으니까, 평소에 조금 더 가까이 지낼 걸 하면서 후회가 밀려오더라. 다행인 건 임종하실 때 내가 옆에 있었어. 갑자기 집에서 씻고 있는데, 아빠가 생각나서 짐을 싸들고 병원에서 자야지 하고 마음먹었었거든. 참 신기하지..."
난 속으로 생각했다. 왜 옛날 아버지들은 항상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까. 왜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랑 데면데면하고, 엄마의 전화를 통해서만 말을 전달받고 있을까. 그러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프거나 돌아가신 후에서야 후회할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건강할 때 자주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있으면 다가올 아버지 생신 땐 조금 더 가까이 앉아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달 사이 다녀온 네 번의 장례식은 죽음이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시켜 주었다. 죽어버리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일까. 아등바등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고통 속에 인생이 잠식되는 것도 죽음의 끝에 다다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삶의 부담이 줄어든다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구나.
인생은 지나고 나면 너무나 짧게 느껴지고 쉽게 잊힌다. 그렇다는 건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는 뜻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조금 덜 후회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