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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Jan 03. 2024

영화 '괴물'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오래전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의 내한공연을 볼 때였다. 공연 레퍼토리, 공연단원 한 명 한 명의 모습과  소개가 담긴 팸플릿의 한 코너에 '합창단원 들은 평소에 성실하고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글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는 아이들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남자아이들로 구성된 미성의 아카펠라 합창단원들은 변성기가 오면서 저절로 단원에서 제외가 되고 이후로 자신들의 선택과 적성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고 성공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설명도 있었다.


과연 '천사들의 합창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드는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금발의 곱슬머리에 흰 얼굴을 한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단원 한 명이 반주 없이 성가의 솔로 파트를 부를 때 그 고운 목소리와 완벽한 선율은 공연장 안의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의 뺨을 스치듯 어루만지며  흐르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흰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며 고음의 선율로 클라이맥스를 지나 신비하고도 잔잔히 마무리가 되는 모든 순간들이 지날 때에야 비로소 여기저기서 관객들의 작은 감탄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았다.

'사회적 약자', '편견' 그런 단어가 떠오르는 영화의 도입부였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교직사회를 그리는, 어쩌면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인 건가? 하는 장면이 천천히 지나가는가 싶은 순간에 홀연히 누구나 마음속에 담고 살아가고 있는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누군가에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잘못을 저지르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야 말았던 기억들이 맞닿는 지점의 섬뜩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화의 첫 번째 시선과 두 번째 시선을 따라갈 때, 고구마 백개를 먹는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영화의 세 번째 시선을 따라가기 시작할 때 그동안의 답답함을 밀어 보내는 것은 '사이다'가 아니라 '맨 밥 백 그릇'이었다.

그랬던 거야? 그렇지. 그랬구나. 그렇겠다. 그렇고말고.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밖엔 도리가 없었겠네..... 그래 그래 그래....


그렇게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는 동안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겨버렸다.


그래, 그래. 잘 봤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주 잘 알겠어. 괜찮은 영화였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감독은 그래서 주인공 역할을 대로 연기해 낸 두 어린아이가 앞으로 살면서 받게 될 질문에 대해 대답을 준비할 여건을 어른의 입장에서 마련해 주었나? 앞으로 긴 세월 이 화려한 작품에 출연했던 이력을 가지고 필모를 쌓아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감독의 그늘 아래 살아가게 될 앳된 두 남자아이들에게 말이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최근 그의 작품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하고 묻던 그 물음이 두 아이들에게 던져지게 될  때 그 아이들이 대답할 것에 대해 함께 준비해 주었나?


소외된 것들에 대해 제대로의 빛깔을 담아 보여 주었으니 딱히 영화의 완성도에 딴지를 걸 생각은 없지만 나는 여전히 여리고 어린 두 아이들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탄식처럼 같은 말을 되뇌고 있다.


  '그대 둘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내 우려대로 영화는 이미 퀴어 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뉴스가 검색이 되었다.


'누구나 조금씩 괴물'이라는 메시지의 종착역이 많은 대중에게 '퀴어'코드로 정착될 우려를 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감독이 만들어온 영화의 모든 메시지들은 거짓이 될 것이다. 감독의 전작들이 하나같이 세심하게, 은밀하게  소외되어 가는 이야기들에 초점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으론 '퀴어' 코드로 정착하는 많은 '대중'도 계산에 둔 것이었다면 감독은 영리하다.


그러나 두 가지의 경우 모두 '두 소년'에 대해 시선을 거둘 수 없을 정도의 가혹함이 전해진다.

나만의 감정과잉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15살, 16살의 미성년 연인들의 아름다움을 궁극의 영상미로 담아내어 세기와 세계의 명작으로  찬사 받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그때 그 배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찍은 영화의 장면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던 그때부터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상처를 받은 채 평생의 세월을 혹독한 방황의 시간으로 지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텐리큐브릭의 명작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연 '말콤 맥도웰'에 대해서도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영화 이후의 인생이 평탄하거나 수월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대중들에게 다가갈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해 가능한 톤으로 색이 입혀지는 일.

두 아이들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연기를 했을 테고 눈빛과 표정과 동작을 만들었을 테니 어느 날 홀연히 자신들의 연기가 전하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그날, 그 아이들의 정서와 각성에 대해 어떠한 안전장치를 해 주었는지 나는 자꾸만 묻고 싶어 졌다.


넷플릭스에서 그 감독의 이름에 끌려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로 보게 된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서도 그랬었다. '마이코'와 '게이코'. '게이샤'로 통칭되는 여성 상품화 시장에 대한 내용을 '우아한 전통'에 대한 향수와 동경의 시각으로 그려내는 전개에 화들짝 놀라야 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마이코' 문화의 추종자들이나 후원자들이 내 주변의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동경하거나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으로 그려지는 두 남자아이.

그리고 노골적으로 보도되는 '퀴어 종려상' 수상 소식.


나는 안다.

사춘기를 지나는 모든 과정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게 되고 쌓아가게 되는 온갖 환상과 정체성들의 혼돈스러운 과정들을.


두 아이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갖게 될 마음의 부담을 먼저 연기해 버렸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예술인'을 선택한 '연기자'의 숙명으로 그들은 생각보다 성숙하게 자신들이 했던 한 때의 '연기'를 뿌듯해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연기를 두 아이는 해냈다.


단지 누구나 걷게 되는 인생의 안갯속을 걷는 시간을 맞이하게 될 때,  불현듯 자신들의 연기가 의미하는 것들에 대해  각성하고야 마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 대다수의 사람들은 겪지 않무거운 의미를 가진  장치임에) 그 두 아이들의  속에서 애를 써서라도 그다지 커다란 무게가 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준비는 되어있는지? 그것에 대해 나는 자꾸만  묻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3대 소년 합창단원들은 변성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공연에서 제외가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어린아이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1900년대 초반부터 제법 오랜동안 합창단원이었던 아이들은 변성기가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소년기에 용도를 다 한 변성기의 청소년들이 준비도 없이 사회로 쫓겨나듯 나가서 지내는 동안 알려진 제법 많은 불행한 사례들이 있다고 한다.


그 후로 천천히 오랫동안 사람들은 합창 단원을 선발하고 노래를 연습하고 공연을 다니고 성장해서 저마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진로를 선택하기까지 세심하게 돌보는데 중점을 두어왔다고 한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시기가 영원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지고 전통으로 이어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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