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분주하던 때에 교수님께서 그 사실을 안내하시면서 특수교육과 재학생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에 꼭 자원활동가로 참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권유하셨다.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 학과 전체 학생들은 한마음으로 패럴림픽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4월에 단체 체육복을 준비하는데 필요하다며 올림픽회관 체육관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사이즈를 재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학생이 더 많은 학과였다. 친구들이 보는데서 신체 사이즈를 재야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라의 큰 행사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니 다들 불편함을 참고 정해진 날짜에 체육관으로 모였다.
키재기 자와 몸무게 측정 저울과 줄자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 행사 동원에 필수요원이던 군인들이었다. 우리 친구들도 하나 둘 군대에 입대하고 있던 때였으니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연령대의 군인들이 가슴둘레와 허리둘레를 재는 줄자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가능하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외면하려고 했지만 그 친구들의 애써 진지한 표정 뒤에 숨은 장난기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동원된 군바리들이 2인 1조가 되어서 동원된 여학생들의 신체 치수를 꼼꼼하게 쟀다.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날과 그 이후 그 군인 친구들의 이야깃거리에 필연적으로 우리 한 명 한 명이 등장하게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중간중간 남자 동기들이 순서대로 서서 매의 눈으로 감시를 해 주었다.
귀찮게도 그것이 1차 측정일이었다.
여름이 되기 전에 한차례 더 측정을 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 과친구들은 친절하게 공강을 내 주신 교수님의 배려를 받아 같은 장소로 가서 지난번과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신체 사이즈 측정을 하고 왔다.
4개월 남짓의 기간 동안 우리가 엄청나게 다이어트를 했는지, 스트레스로 엄청나게 먹어대서 사이즈를 늘렸는지가 궁금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그 체육관을 나오면서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한 친구가 말했다.
"야! 이렇게 남자 군바리들이 가슴둘레, 허리둘레, 엉덩이 둘레를 꼼꼼하게 재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냐? 내 생각에 다음 달에 우리는 대, 중, 소 포장된 체육복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될 거 같아. 안 그러겠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래 가사는 단연 진리다.
한 달 후 우리는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서 패키지로 박스포장을 해서 내려보냈을 것이 틀림없는 체육복 묶음을 받아서 스몰, 미디엄, 라지, 엑스라지, 투엑스라지 하는 표시가 된 비닐을 뜯어가면서 몸에 맞는 체육복을 찾았다.
엄마가 보관하고 있던 그때의 기념품들이 있었는데 호돌이 마스코트를 보니 이제야 그 체육복의 디자인 콘셉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을 찍고, 아이디카드를 발급받고, 성내동과 잠실 주변을 드나들면서 서툴고 낯선 응대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경기가 없는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벨기에 대사 부인의 차를 타고 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되는 탁구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패럴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도 일반 올림픽과 다르지 않게 진행이 된다며 본부에서 우리에게 폐막식 입장권을 나누어주었기에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종합운동장의 지정석에 앉아서 폐막식을 보았다.
본부장은 아주 좋은 자리를 특별히 마련해 주었다고 했지만 동원된 우리에게 배당된 자리가 뭐 그럴 턱이 있나.... 출연진들과 공연단원들의 뒷모습과 뒷 대형을 보는 자리였다.
피날레 불꽃놀이를 할 때 맞은 편의 군중들이 '와~' '뷰티풀!' 함성 소리를 냈지만 우리는 그 불꽃놀이의 형형색색을 보지 못했다. 우리 머리 위에서 터졌으니까. 무릎에 놓아두었던 흰색 가방이 화약의 재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서 재투성이 신데렐라 가방이 되었다. 에나멜 가방에 박힌 화약의 재는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머리와 옷에 묻은 화약 먼지는 털어내면 되었지만 가방은 버려야 했다.
화살이 꽂힌 과녁의 점수를 심판과 확인하며 점수판에 적어서 휠체어에 앉아서 과녁을 향해 활을 쏜 선수들에게 달려가 보여주고 사인을 받았다.